애린 이종희

여행기

내 그리운 찰나

강원도 도사곡리를 다시 찾게 되었다.

다소 밀릴 것을 예상한 우리는 내부순환도로를 통과해 서울 외곽도로를 달려 양수리를 거쳤다.

출발부터 심상찮다 싶었는데 서울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빗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꽤 많은 비가 내렸던지 어느 좁은 길에서 자동차는 물보라를 일으켰고, 그 순간 아들 녀석의 환호성은 대단했다. 이처럼 아들의 표현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또 긍정이 있다.

거리마다 길목마다 눈에 띄게 푸른 가로수들이 비바람에 온몸을 맡기는 것이 애처롭기보다는 당당하고 멋스러웠다. 회색으로 얼룩진 날씨인데도 초록은 온 산을 번져 두물머리까지 물들고 있었다.

정지해 두고 싶은 시간을 스쳐 어느덧 도착한 도사곡리는 새로운 비단길이 놓여있었다. 지난해 강물이 마을 끝까지 차오르는 바람에 다시 공사를 했다고 한다.

줄곧 따라오던 빗줄기가 점점 쇠락의 기운을 보이더니 어느새 작은 별무리가 산등성 머리위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별을 보면서 텐트를 쳤고, 그것으로 강변의 야영은 시작되었다.

이윽고 숯불에 고기도 굽고 밥도 지어 일찍 저녁을 끝낼 쯤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루살이 때들이 불빛이 제집인 냥 까맣게 에워싸 버렸다.

갑작스런 습격에 모두들 그것들을 몰아내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는 사이 튼튼하게 묶어두었던 파라솔 하나가 강물 위를 돌며 떠내려가는 것 이였다.

주범은 돌풍이었다. 그 바람은 텐트와 우리의 호흡을 무너뜨리고는 급기야 장대비를 몰고 왔다.

느닷없는 일에 당황한 우리는 비설거지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물에 빠진 생쥐행색을 하고서야 지난해 묵었던 민박집을 다시 찾게 된 것이었다.

“안개 좀 봐라 참 멋지지 않냐?” 는 옆방 일행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간밤 탱크가 지나갈 정도의 코골이 아저씨 덕에 잠을 설친 나를 따뜻한 아랫목이 늪인 냥 끓여 당겼지만, 나는 냉정하게 뿌리치고 방문을 나섰다.

문 앞은 그야말로 아득한 하얀색...정말 안개였다.

몇 포기의 풀과 몇 구루의 나무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이어진 모든 길을 따라 나서고 싶었을 거다.

지난날의 상처와 지난날의 슬픔을 안개 같은 백지로 덮고픈 소망이 있었지.

그럴 때면 나는 먼저 눈물부터 앞섰다. 궁핍 했던 내 안의 감정도 이런 찰나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래서 승천 못한 안개처럼 강이 되어 유유히 흘러보고픈 걸까...

안개와 나만이 한참동안 자리한 공간 사이로 희미하게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개 걷힌 세상은 간밤 비 때문인지 더욱 눈부신 초록의 잔치였다.

이윽고 돌아오는 길은 며느리 고개를 넘어 국도를 선택했다. 고불고불 산길에 난 도로를 달리다가도 어느 한적한 곳에 정차해 쑥과 나물을 뜯기도 했고, 잠시 그 햇살에 마음을 말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늘 일행의 중간에 끼어있었다. 전날에 뒤 늦게 도착한 까닭이 너무 멋진 풍경을 그냥 스치지 못했었노라고 섣불리 고백을 한 탓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걱정하며 기다리던 시간을 다시 재현하긴 그랬는지 일행은 끝까지 우리차를 포위하고 달렸다.

높고 푸른 산속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 사람들은 다 어디로 떠난 것인지, 이미 폐가가 되어 인적이 끊기는가 싶던 마을에 고풍스런 카페가 들어서 있기도 했다.

꿈속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내 생애의 첫 새벽길을 따라 달리고 달려 마침내 밤벌유원지에 도착했다.

그곳의 아름드리나무는 밤나무가 아닌 포플러였다. 때마침 부는 바람에 포플러 잎은 찰랑찰랑 소리가났고, 그것은 내 유년의 노랫가락처럼 맑고 경쾌했다.

늘 바쁨에 익숙해 무엇을 보고 느낄 새도 없이 직진하던 사람들... 이렇게 먼 길 휘어 돌아 청평호를 스치던 내 안의 탄성은 지난날 내 그리운 찰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오월에 떠났던 달콤한 여행처럼...

2007.5.13 .강원도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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