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포토에세이

바람이 기댈 곳은...

집 떠나면 집시가 되는 우리는

비닐하우스 안에 텐트를 치고

그 밤을 보내게 되었지요.

많은 비가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나선 길이

외려 설렜던 건

바로 그런 여건 때문이었을 거예요.

비닐하우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좋을 것 같았고

그 안에서 바라보는 그 밖의 세상이 멋질 것 같았거든요.

그런 내 예감은 역시나 빗나가질 않아

정말 오랜만에 단꿈을 꾸는 것 같았지요.

밤새 오락가락했던 빗소리는

그야말로 세상과 나 사이에 장막을 쳐 주었거든요.

어린 아이가 구석진 자리에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듯

어쩌면 나도 그런 자폐증을 앓고 있는지 몰라요.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않아요.

이별은 만남의 길을 만들고

만남은 또 다른 길을 위해

떠나고 있을 테니까요.

여행을 떠나면

혼자 걷는 길을 좋아해요.

바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그리 낯설지 않는 길을 만나거든요.

비구름이 다 빠져나가지 않은 하늘 아래

푸른 초원은 모두 내 것인 냥

편하고 익숙해져 있었고요.

저는 간만의 자유에 흔들리는

풀꽃이고 싶어졌어요.

은 초롱 빗방울이

아직 떠나지 않은 들녘의 풀잎들은

제 무게에 버거워 보이긴 했어도

싱그러운 풋내를 털어주면

바람은 고맙다는 듯 다시 한 번 휘 돌다

어디론가 떠나갔어요.

그리고 그것이 끝인가 싶은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찰나

어느새 바람은 제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요.

어쩌면 바람이 기댈 곳은 풀잎인지도 몰라요.

가녀린 어깨에 기대어

많은 이야기를 내려놓고

홀연히 떠나기를 수 없이 반복하면서도

결국은 다시 돌아와 있거든요.

풀꽃과 바람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히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애증으로 다가선 그대

그대 스치는 날엔

하늘 향해 솟던 그리움

깊은 산 담장에

꼭꼭 숨기고 싶어요.

이제는 덮어두자

맹세도 했건만

한 낮 햇살에 수줍게 웃고 나면

어느새 그대는

여린 마음 흔들고

섧게 떠나갑니다.

저 구름이

구슬픈 내 노래마냥

겹겹이 새긴 기억

풀어준다면

휘청대는 내 사랑도

의연할 수 있을까요.

지워도 지울 수 없는

슬픈 내 이연(異緣)은

때로는 낯선 영혼처럼

적막한 들녘 이슬 되어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다 문득

그대 지나는 날이면

끝내 초연할 수 없는 것이

그대는 바람,

나는 풀꽃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