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야기
자욱한 안개 덕에 며칠째 내가 좋아하던 가을 들녘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막을 뚫고 섬세하게 다가오는 가을빛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그 모든 환상을 걷던 날 확연히 들어나던 그 황량한 가을 녘이란...
그랬었다. 안개가 장막을 치고 있는 사이 바쁜 농부는 황금물결을 꿈꾸던 내 의식의 들녘을 감추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을이고, 가을을 갈망하는 우리는 그곳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저물 무렵 도착한 우리가 산 낚지를 안주삼아 술잔을 기우릴 때 마침 노을은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말랑한 얼굴로 지평선 아득히 소멸해가고 있었다.
가을에는 어떤 냄새에도 그리움을 일깨우는 바람이 있다.낙엽 타는 소리마저 예민한 감성으로 모든 것을 흔들 때이다.
늦은 밤 농부가 모아둔 들깨 단을 태우며 우리는 다음 여행을 이야기했고, 아득히 사라져간 어제의 이야기를 했다.
모닥불이 사그라지기 전에 한기를 느낀 우리는 그때서야 비닐하우스 안에 아담하게 지어둔 보금자리에 누웠다.그리고 풀벌레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간밤 어둠을 밀어내던 현란한 불의 춤사위도, 그것에 매료되어 철없는 아이처럼 들떠있던 시간도, 남겨질 그리움의 앙금이라 하기엔 다시 맞은 아침 해는 너무도 눈이 부셨다.그 모두를 뒤로하고 홀로 걷는 들녘은 그야말로 나만의 특별한 여유고 행복이었다.
마르고 마른 모래바람이 이 촉촉한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꿈이라도 꾸었을까. 어제도 그 전날에도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이 보이는 것만을 향하느라 나는 숨이 가팠다.아니 어쩌면 나는 가픈 숨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세상만을 탓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이어주는 어제였다 하기엔 지금 이 가을 녘은 참으로 감미롭다.억새꽃 아래 색색의 들꽃이 그랬고, 그 꽃을 역주행하는 햇살이 그러했다.
내가 자주 듣던 음악도 싱그러운 향기로 사방에 번지고 있었다.
사과향이... 장미향이 이럴까...
익숙하고 고요하게 의식을 일깨우며 밀려오는 가을 녘은 스스로가 달콤한 사랑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갈빛같은 몽롱한 의식으로 가을을 바라보는
내 영혼의 자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