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동창회
해마다 총 동창회 날이 다가오면 어깨를 눌러대는 돌덩이가 있었다.
인원체크부터 시작해서 음식 메뉴 등등 소소한 구석까지 내 머릿속을 잠식해서 그날의 영상을 만들기 까지가 때로는 버겁고 무거웠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산란한 시간을 건너는 대부분의 벗들이 장거리인 그곳까지 이동해 참석하기가 여간해서는 힘들 거란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곳이어야만 되는 이유가 있었다.
88년 올림픽이 한창이던 8월19일, 제대를 앞둔 친구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

그 후 해마다 6월이 오면 뜻있는 친구들이 친구를 찾아 대전 현충원에 움집하게 되었다.
시작은 그러했으나 그곳은 전국에 흩어져 살아가는 친구들이 가장 편하게 모일 수 있는 중심에 있었고, 떠난 친구를 잠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맞추다보니 그곳은 우리들의 동창회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이 늘어가고 또 해야 할 일이 많아질 수록 해마다 이런 일을 반복해야하는 나에겐 점점 무거운 짐이 되어갔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어떤 구실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친구들의 묵묵부답은 어쩌면 내 자유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변명의 여지가 되어갔는지도 모른다.

내 이런 마음이 깊어 해거름을 맞으려는 찰나였을까. 여명의 시작이었을까.
찬조금을 보낸 한 친구의 문자가 도착했다.
“친구들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너희들 노력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너무 적구나 싶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소중한 정서를 계속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모임이 좀 더 발전해서 우리가 몸담았던 작은 학교와 우리 마음의 안식처인 고향의 미래에도 조금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우리들의 동창회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함께하지 못해 정말 미안해.“
일순간 내 가슴은 먹먹했고 멍한 눈길로 가만히 하늘을 보았다. 내 좁은 마음에 구멍이 난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친구들은 어지간한 내 부탁은 거의 들어줬다.
이번에도 한 친구는 거제도에서 여러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서야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친구들이 좋아할 것 같은 유년시절 먹거리를 잔뜩 들고 와서는 시장에서 막 돌아오신 엄마의 보따리가 궁금한 어린 아이들 같은 내 친구들에게 넉넉히 풀어놓았다.
해가 거듭 될수록 철이 들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한편엔 짠한 마음이 든다.
내 좁은 그릇으로 하여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의 그늘아래 마음껏 응석을 부릴 수 있는 마음이 이젠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