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도 비렁길 5코스 (기행문)
그 많은 사연을 남기고...

포구가 깊다 하여 “깊은 개”라고 불리어졌다는 심포는, 바다에서도 마을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태풍마저도 쉽게 다가서질 못하는 까닭에, 해안 경비선은 바다가 위험할 때마다 포구로 급하게 들어와 정박을 한다. 그래서 섬 주민들은 더 이상 가두리 양식장 허가를 낼 수 없는데, 덕분에 심포는 여전히 깨끗한 바다를 끌어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렁길 4코스 데크길을 빠져나오자마자, 캠핑 온 노부부가 이제 갓 잡아 올린 대형 감성돔으로 회를 뜨고 있다. 부러운 눈길을 스치며, 심포에 하나밖에 없다는 식당 입구에 서서 무얼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식당주인이 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인천에서 방금 내려왔다며, 식사 준비를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아쉬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안도가 고향이고, 초등학교 선배님인 걸 알게 되었다. 인천에서 식당을 경영하셨던 선배님은, 생선 다루기가 여간 서툰 게 아니어서, 오랜 경험이 있는 육류로 요리 종목을 바꾸셨는데, 오히려 고향 분들의 식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고 한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방풍 막걸리 한 병 받아 들고는 비렁길 5코스로 향한다.

마을로 깊숙이 들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바다를 향해 걷는 시간이 만만치 않아도, 내 미지에 대한 기대는 싱그러운 계절을 닮아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다.

약간 경사진 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찔레, 매화, 오리나무, 아이비가 어느새 봄을 올리느라 왁자하고, 오른쪽엔 쓰다 남은 거대 배수관이 세월의 더께를 쌓으며 낡아가고 있다.


겨우 손수레가 지날 수 있었던 좁은 비포장 길에 반듯한 도로가 놓이고, 그 도로 위에는 흙과 나뭇잎들이 퇴적하여 잡풀의 터가 되었다. 그 틈에서도 냉이는 유별나게 돋보여 지나는 아낙들의 대화 속에 살갑게 안긴다.


도로 끄트머리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일종고지는 시선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해방 후 벌목이 금지된 일종고지는 아름드리나무들로 무성했다는데, 낚시꾼들이 어떻게 알고는 밤에 몰래 나무들을 베어 배로 끌고 가는 바람에 심포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종고지
짜밤(잣밤) 나무가 많아 섬 아이들의 간식을 제공하는 동화의 숲이었던 일종고지는 그늘진 이야기도 많다. 일종고지의 주인이 선주였을 때, 먼 바다까지 정치망 그물을 놓기도 했다는데, 부패된 주검이 그물에 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과학적으로나 법적으로 너무 낙후된 시절이라서 임시로 일종고지 한쪽이 무연고 무덤으로 채워졌는데, 너무 허술하여 주검들은 폭풍우에 휩쓸려 바다로 수장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왼쪽 장지를 향하는 모습은 호랑이를 닮고, 오른쪽 마을을 향하는 모습은 거북이를 닮아, 집안에 우환이 깃들 때는 혹시 일종고지가 마을로 들어오는 바다를 막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기도 했단다. 하지만 일종고지는 예나 지금이나 바다 생물들의 최적화된 환경인 까닭에 사람의 발자국이 끊이질 않는다.



짜밤(잣밤) 나무와 열매
일종고지를 놓아주고 옛 마을 터, 큰막개에 들어서자마자 우람한 짜밤 나무가 보인다. 막개 마을의 재단 齋壇이었던 이 노거수는 사람들의 염원을 먹고도 어떤 시름도 없이 해마다 제 유전자를 밀어 올리고, 세월의 무게도 무색하게 더욱 싱싱하고 다부지게 지나는 길손을 반긴다.



큰막개 마을 터/ 마르지 않았다는 샘엔 음지 식물만
보돌바다에 몸을 풀던 태풍에도 끄떡없던 돌담들이 온기를 잃은 채 녹슬어가고, 한 번도 마른 적 없다던 샘이 저 홀로 늙어가고 있다. 어쩌면 막개 마을은 주소지를 상실한 출향민들 기억에 아련한 향수로 떠돌고, 그나마 단단하게 다져진 길이 지워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막개 터
돌계단을 따라 아담한 숲길을 지나 작은 막개마을에 이르러, 문득 뒤를 돌아본다. 흔적 없이 사라진 가옥들 너머로 지난 추위에 생명을 잃은 누런 대숲이 보인다. 냉기가 너무 또렷하여 스산한 바람이 내 마음을 관통하는데, 나는 어떤 두려움도 없이 척박한 땅을 일구던 온기를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한때는 알곡을 생산한 축대였을 돌담이 시누대 그늘에 밀려나고, 불쑥 다가선 매화에 호흡을 안으로 끌어당기는데, 세상여를 향해 달려가는 배 한 척이 지루할 틈도 없이 마음을 붙잡는다.


틈을 채운 소사나무를 뒤로하고 약간 오르막길에서 하마터면 놓칠 뻔한 길마가지나무 꽃에 머문다. 여린 꽃잎에 남겨둔 바람의 입김을 놓칠 수 없어, 나는 앞서간 걸음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시선을 고정시킨다. 찰칵 찰칵 찰칵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내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 때는 두고 온 카메라가 후회되고, 막개 전망대를 향해 걸음의 속도를 올리다가도 자꾸만 고개를 돌린다.


막개 전망대 오른쪽 솔숲에 아슬하게 걸친 손죽도, 소거문도, 대암, 소평도, 평도, 구도, 광도, 거문도, 문도, 알마도, 백도, 검등여, 하백도, 납작도 소리도를 손가락으로 쿡쿡 눌러보다가, 한 잔의 방풍 막걸리와 쑥전에 때늦은 끼니를 채운다. 풍경에 취하고 맛에 취해 오래오래 주저앉고 싶지만, 가야 할 길은 아직 가늠할 수 없어 훌훌 털고 일어난다.




야자매트가 깔린 작은 돌밭 길을 지나고 계단으로 오르자, 크고 작은 염원들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성지로 거듭난 돌의 나라가 펼쳐진다. 이내 발자국은 숲구지 전망대에서 끊기고 소부도, 녹섬, 부도와 마주 보고 있는 까치섬과 우리 동네 서고지의 환한 표정을 본다. 무수한 돌무더기를 덮으며 몸집을 늘린 마삭줄 영토를 지나고, 더욱 빨라진 걸음은 다시 온다는 약속도 바람도 없이 마지막 데크 계단을 지나 동백 울타리 옆길을 스친다.




심포 쪽 일종고지 해변에서 시작된 원시의 지명, 막게목(심포몽돌밭), 활끝, 땇여, 돌 무너진 자리, 멍개통, 세모통, 대리비치통, 막개해변, 꽃밭등, 문바위, 숫구지, 장지해변으로 이어지는 숱한 사연의 물보라가 아릿한 몽환으로 수면을 채운다.

바다에서 비렁길 5코스의 바깥을 다 보고 들려주시던 한 선배님의 조망에 다가설 수 없었던 아쉬운 마음은, 안도대교 풍경이 열리는 순간, 마치 꾹꾹 눌린 환희가 툭 터져 나온 듯 뭉클한 물결이 출렁인다. 그 한가닥의 포말 속에 저장된 지난한 걸음이 없었다면 만나기 힘든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린 날, 천둥번개가 노닐던 무서운 밤을 보내고 새벽이 오면, 부스스한 잠을 털어내며 비 비린내 나는 새랍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망산을 보고 있노라면 한쪽 귀퉁이 돌들이 자잘하게 부서진 채로 쏟아져 있었다. 그때 나는 엉뚱한 상상에 사로잡혀, 저 돌들을 무너뜨리려고 밤새 그리도 험상궂은소리가 났나 보다고 안심하곤 했다.

서고지에서 바라본 망산(비렁길 5코스)2023.7.30
내 마음에 머물던 망산의 동화가 너무 밝은 기운에 홀연히 날아간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나는 너무 오랜만에 가슴에 머물던 뜨거운 습이 눈가로 번지는 길을 걸었다.




하지만 언제나 길 끄트머리에 서면 , 다 왔다는 안도 바깥으로 흘러나온 공허가 지난 길을 위로할 뿐, 특별한 포만감을 누리는 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걷는다.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며 호흡을 가다듬고
일상을 갈무리하듯이,
바람이 쉼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숙이며
앞으로 나가듯이,
비렁길이 쉼 없이 이어온 사연을 들추어
아낌없이 보여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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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1코스에서 5코스까지 동행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비렁길 6코스, 7코스가 이어지고, 그 길을 제가 건강하게 걸어보는 꿈같은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늘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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