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에 또바리가 있어 참 다행입니다
감당하기 버거운 일을 겪으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많은데, 그중에 또바리와 연관된 일화 두 장면을 소환해 보려고 합니다.
국민학교 4학년 봄날이었습니다. 곡성에서 여수로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엄마는 새벽부터 부지런히 이삿짐을 싸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삿짐이라야 이렇다 할 살림이 있는 게 아니어서 대부분 식구들이 나르는 일이 다반사이던 시절이었지요.
엄마는 아침을 먹자마자 조그마한 다라니에 그릇 몇 개를 넣어 제 머리에 올려주시고는, 이고 갈 수 있겠냐고 물으셨습니다. 별로 무겁지 않았습니다. 전날 엄마와 이사할 집을 다녀왔기 때문에 집 찾아가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수 군자동 꼭대기를 아신다면, 그리고 봉산동 꼭대기를 아신다면 제가 얼마나 오래 걸어야 할지 가늠하고도 남으실 겁니다.
군자동 계단을 내려와 한참 동안 시내를 걸어 봉산동 계단을 올랐습니다. 시내를 통과할 때부터 아프던 고개가 급하게 통증을 끌어올렸습니다. 봉산동 중턱쯤 오를 때, 저를 스쳐간 아주머니가 제 신음 소리에 돌아보셨습니다.
"좀 내려줄까?"
그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박차고 오른 설움이 제 울음보를 왈칵 건드린 것이.
"아이고, 많이 힘들었나 보다. 어린것이…… 쯧쯧."
다라니를 내려주신 아주머니의 안타까운 얼굴이 아직도 흐릿합니다. 아무리 무게를 완충해 주는 또바리가 있다 해도, 내가 감당할 무게는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방울들을 흥건히 쏟고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 벌세울 때 늘 하시던 호령이 있습니다.
"두 팔 들고 서 있어!!"
그런데 저는 물건까지 이고 먼 길을 걸었으니 얼마나 큰 벌을 받았는지, 지금도 아찔합니다. 눈물도 땀방울도 거의 말랐는데, 금방 따라오신다던 엄마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길로 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습니다. 제 눈물과 땀방울을 흡수한 수건을 돌돌 말아 머리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라니가 머리에 닿기만 하면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결국 수건 또바리는 들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바리가 없어도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몇 계단 오르지 않아 우리가 살 집으로 곧장 가는 골목이 나왔습니다.
봉산동 집이 어느 정도 익숙해져도 또바리를 사용할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마당 깊숙한 자리에 수돗가도 있었습니다. 매일 주인집 라디오에서 "이 강산 푸르게"라는 멘트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말에 맞는 나무를 봉산동 정상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놀다가 발견했습니다.
이윽고 신나는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식구는 갑자기 섬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섬은 물이 가득한 바다를 앞에 두고도 너무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엄마 따라 빨래통을 이고 동백숲을 스치고 스쳐 물웅덩이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물웅덩이는 물을 퍼낼 때마다 허연 침전물이 구름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때의 절망감은 나중에 비바람 부는 날, 쓰고 있던 우산이 무용지물이던 하굣길만큼이나 컸습니다.
긴 목마름을 견딘 그 섬에도 드디어 비가 내렸습니다. 우리 집 장독대 작은 시멘트 담장 위로 물이 찰랑찰랑 채워진 물동이가 나란히 섰습니다. 사각의 시멘트 장독대 담장 상부는 물동이를 놓을 수 있을 만큼의 넓이여서, 엄마는 물을 가득 채운 물동이들을 장독대 담장 위에 올려놓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때는 우리도 작은 바케스를 들고 물을 조금씩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이 되어도 물동이를 제대로 이어본 적 없었던 저는 갑자기 물동이를 이어보고 싶었습니다. 부엌문 왼쪽 나무 벽에 걸려 있던 또바리 끈을 입에 물고 물동이 이는 연습을 했습니다. 삼 분의 일 정도 물을 채운 물동이 양쪽 손잡이를 잡고 역기를 든 선수처럼 물동이를 힘껏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 번 만에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또바리도 내 머리와 물동이 사이에 안정감 있게 잘 끼워져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해진 저는 제일 반짝이는 물동이를 골라 새랍 밖으로 나갔습니다.
샘으로 가는 길은 좁았지만 완만하고 예쁜 길이었습니다. 길 왼쪽엔 내 친구랑 같이 동백꽃물 따 먹던 동백나무가 있고, 오른쪽엔 길 아래로 2미터 조금 안 되는 자리에 친구네 밭이 있었습니다. 서쪽 바다가 훤히 보여, 계절 따라 흘러가는 노을을 볼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동생이랑 ‘엄지공주’ 만화를 보고 난 후 하염없이 맑아져서 귀여운 들꽃을 만나러 가던 길이기도 했습니다.
샘은 깊지 않아서 두레박이 필요 없었습니다. 반쯤 물을 채운 양동이는 겨우 들 수 있었습니다. 물 한 바가지를 덜어내고서야 샘 입구, 제 허리쯤에 있는 돌담 위까지 물동이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바리가 물동이에 쓸려 떨어지지 않게 끈을 입에 물고, 마음속으로 구호를 외쳤습니다.
"하나, 둘, 셋!"
물동이를 힘차게 들어 올렸습니다. 간신히 물동이가 또바리 위에 안착한 것 같았는데, 문제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동이 안에 있던 물이 파도놀이를 심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어떤 방향을 잡았는지 감지하기엔 출렁이는 물의 힘이 너무 셌습니다. 한쪽에서 제 몸을 급하게 끌어당기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뿔싸 저는 길 아래 친구네 밭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흙 범벅이 된 몸은 둘째 치고, 동이가 너무 찌그러졌습니다.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또바리 끈은 그때까지도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놓치지 않으려고 어디엔가 힘을 준 것 같은데, 그게 제 어금니였던 모양입니다.
그런 혹독한 신고식 때문인지, 물동이 이는 것은 거의 공포가 되어 다시는 머리에 뭘 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인지 제 키는 1년에 10cm씩 자라, 먼저 커버린 친구들 키를 따라잡고도 남았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 우리 고향 사람들은 바쁘고 힘드셨습니다. 산밭을 일구다가도 돌아올 땐 쓰고 있던 수건을 벗어 또바리를 하고, 이고 지고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겨우 허리를 폈습니다.
중년의 자락에서 친구들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서야 제가 얼마나 편하게 컸는지 알았습니다. 그때 제가 근성을 갖고 물동이라도 잘 이는 야무진 딸이 되었으면, 울 엄마 새벽잠이 좀 넉넉했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