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칼럼·서평

(빈센트 반 고흐)당신이 만난 낯선 사람들처럼

하필 가장 추울 때, 조카와 아들은 사회 첫발을 딛게 되었고, 요즘 나와 동생은 서로 조카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우리 다롱(조카애칭)이는 출근할 때 얼마나 추웠을까?”

“어제는 내의를 입으라는 내 말에 짜증을 내더니,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내복을 입고 출근 했어 ㅎㅎ.”

첫 직장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는 요즘, 조카는 고등학교 때 학원 원장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의 부름이 있었다. 3개월 인턴 과정을 거치고 다음 수순을 밟는 것인데, 동생은 아이 하나 유학을 보낸다는 심정으로 막내딸이 기거할 원룸을 서울 중심지에 얻어두고, 며칠 적응하는 것 보고 내려가겠다며 서울에 머물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 5호선을 타고 가다가 9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여의도에 내리고, 9호선을 타고 가다가 3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그리고 두 정거장만 더 가면, 예술의전당이 있는 남부 터미널역이 나온다. 우리 자매가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것은, 1조 원의 가치가 넘는 반 고흐 진품 명화 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동생의 큰애가 서울에 있는 동안 이모랑 같이 보라고 끊어준 티켓 덕분인데, 우린 아무런 생각 없이 있다가 느닷없이 설레었다.

거리의 바람은 미세했지만, 날카로운 추위는 피부를 뚫고 들어올 듯 매서웠다. 그래도 뭐가 그리 신났는지, 우린 사춘기 소녀마냥 깔깔 거리며 예술의 전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오전이고 평일인데 티켓을 발권하려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그곳을 한참만에 지나도 관람을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었다. 자세한 작품 설명을 듣기 위해 오디오 가드를 구입하고 입장하였는데, 그 덕분에 더 오랜 시간 동안 머물며 더 깊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나는 며칠 인터넷과 영화를 통해 반 고흐를 알아보느라 시간 가는줄 몰랐다.

내가 알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정신질환을 크게 앓았고, 고갱과 헤어질 때 그 충격으로 귀를 잘랐다는 것과 살아생전 그림을 1점밖에 팔리지 않아 너무 궁핍했다는 것, 그리고 동생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은 17세기 때부터 그림이 유행이었는데, 구필화랑 공동 창업주인 삼촌 덕분에 1869년도인 16세 때 네덜란드 헤이그 구필화랑 화상으로 일하게 되면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흐의 의식이 크게 바뀐 것은, 영국의 런던 지사로 발령 나고 나서부터였다.

장기불황으로 소외계층의 극빈한 삶을 목격하며 목사인 아버지를 둔 기독교 가치관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계기가 된 것이라는 내용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런 누적된 감정의 시발점은, 어쩌면 고흐보다 1년 일찍 사생아로 태어난 형의 이름을 가지고 살면서인지도 모른다. 고흐는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형의 무덤 비석에 새겨진 빈센트 고흐라는 자신의 이름을 보고 자랐다고 한다.

초기 유명 작품/감자 먹는 사람들

고흐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27세 때이고, 숨을 거둔 37세까지 900점에 가까운 유화와 1100점이 넘는 스케치, 그리고 고흐를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와주던 동생 테오에게 650통의 편지를 남겼다.

고흐가 정말 자살을 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죽임으로 숨을 거두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사망 원인은 시대적 흐름과 편리에 따라 확정되고, 고흐가 죽고 난 후 실의에 빠진 동생은 6개월 만에 숨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동생의 아내 요한나가 고흐의 그림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마캐팅과 함께 꾸준히 전시회를 열었다는 것은 다른 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림의 상속자인 조카, 빈센트 빌렘 반고흐가 끝내 네덜란드 황실에 고흐의 편지와 그림을 기증하였다는 것과  반고흐의 미술관은 1973년 네덜란드 여왕의 주도로 개관하여, 지금도 꾸준히 15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아온다는 내용은 [반 고흐의 위대한 유산]이라는 영화를 보고 알게 되었다.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며 선물한 아몬드 나무 꽃/형을 좋아해서 아들 이름도 빈센트로 지었다고 함

작품 중에는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별이 빛나는 밤에]가 있는데,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화랑의 공동체를 낙관하며 고갱을 만나 희망을 이야기했을 때 그렸다면, [별이 빛나는 밤에]는 고갱과 싸우며 결별하는 과정에서 귀를 자르고 난 후, 단절의 감정이 깊어 정신병원 입원 중에 남긴 작품이라고 한다.

론 강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이 빛나는 밤에

오늘 아침 나는 해가 뜨기 한 참 전에는

창문을 통해 아무것도 없고 아주 커 보이는

샛별밖에 없는 시골을 보았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은데, 어릴 적부터 책을 광적으로 좋아하면서 쌓은 풍부한 문학적 지식이 더해, 편지에는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글이 많다고 한다.

실제 인터넷에 떠도는 글만 읽어도 고흐에 대해 이제야 눈을 뜬 기분이 들었다. 애니메이션 영화 [리빙 빈센트]에서 아르망이 편지를 전달하며 알게 되어 고흐를 좋아했던 우편배달부 아버지의 요청으로, 빈센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장소로 찾아가, 인간 빈센트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기분도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천재적인 감각으로 그려낸 무수한 그림 속에는 서민들의 삶이 대부분이고,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표현하려고 애썼던 빈센트 고흐, 돈 멕클린이 추모곡으로 부른 [별이 빛나는 밤에] 라는 노래 가사 중에는 "이 세상은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곳이 못 되었다" 라는 내용이 있다.

별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늘 지도의 검은 점들을 보며

도시와 마을을 꿈꾸듯이 그렇게 소박하게 꿈을 꾼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타라스콩이나 루엥으로 가듯

우리는 죽음을 통해 별로 간다. 살아 있는 동안은

죽은 사람이 기차를 탈 수 없듯, 별에도 갈 수 없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아무래도 나는 한동안 고흐 앓이를 하느라 이 겨울 추위를 알지 못하게 될것 같다. 공허에 길들여진 지 오래라고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몰입의 반짝임이 내 마음 어딘가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https://youtu.be/MUUH91S1iFo?si=gIr7rsmE7jKfKutu

[돈 멕클린의 빈센트/고흐의 명화가 삽입된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