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산문

그곳의 갯바위는

고향에 내려가면 으레 다니는 밤 산책 코스가 있다. 집을 나와 왼쪽 부도로 이어지는 옐로 브리지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피싱 그라운드가 바로 그곳이다. 섬을 에워싼 화려한 조명과 새로운 구조물이 적막한 섬마을의 구세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향수를 지탱해 온 아지트를 숨겨버린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마당널로 이어진 새로운 해변길이 누군가의 입김으로 멈추더니, 그 자리에 새로운 구조물, 낚시터가 생겼다. 그런데 그 낚시터는 너무 높아 낚시를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판단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곳에 가면 심심치 않게 낚시꾼들을 만날 수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랫집 윗집’이라고 불리는 숲속에서 살 때였다.

섬으로 이사 온 뒤 지독한 감기를 앓고, 방에 눕기만 하면 천장이 뱅글뱅글 돌더니,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서 그 증세가 말끔히 사라졌다. 엄마의 허락을 받은 나는 윗집에 사는 친구와 '집밑'이라고 불리는 바닷가로 물놀이를 가게 되었다.

숲속의 아치 터널을 지나면, 바다로 곧장 내려가는 솔밭길이 있었다. 풀 사이를 헤치며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맹감나무와 엉겅퀴, 고사리 그리고 길쭉한 풀이 많았다. 그 길 맨 끝이 바로 지금의 낚시터이고, 바닷가에는 해식애와 해식대지 중간쯤 되는 바위가 산 끄트머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친구를 따라 맨발로 가파른 바위를 걷다 보면, 너무 아찔해서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그렇게 위험한 곳에 아이들을 보내지 말아야 하는데, 그때의 엄마들은 위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넓었다.

바다가 어느 정도 썰물 지면 바위에도 평평한 자리가 드러났다. 그 바위는 우리가 물에 들어가기 적당한 자리였다. 주변에 히통(부표)이라도 주울 수 있으면 다행이었고, 그것마저 없으면 틉(스티로폼)조각을 주워 놀았다. 그런데 친구는 처음부터 섬에서만 살았으면서도 나보다 수영을 더 못했다. 잠수도 내가 더 잘했고, 물에 뜨는 것도 내가 더 잘했다. 흰 조약돌이라도 주우면 그것을 물속에 던져 놓고 잠수해서 주워오는 놀이를 했고, 물 건너 낮게 드러난 갯바위를 터치하고 돌아오는 경기도 했다. 수영 실력이라고 해봤자 곡성에 살 때 압록강이라고 불리는 작은 웅덩이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구리헤엄이 전부였다. 바닷물보다 뜨기 힘든 민물에서 시작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바위 사이에 있는 웅덩이는 소꿉놀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빈손으로 내려가도 바닷가에는 우리의 세간살이로 쓸 수 있는 조개껍데기가 많았다. 놀다가 귀에 물이 들어가도 걱정이 없었다. 뜨겁게 달궈진 조약돌에 물 들어간 귀를 대고 누워 있으면, 물이 스르륵 빠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이제 집에 가자.”라고 누군가 말하면, 민물 흐르는 곳에 가서 여러 차례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겉옷을 입었다. 옷을 입고 일어서면 제일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일이었다. 내려올 때는 느끼지 못했던 허기까지 더해져, 걸음의 속도나 자세가 흐트러지고 무엇보다 힘센 숲길이 몸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맑게 흘러내린 민물이 반짝이던 곳,

작고 앙증맞은 줄무늬 물고기가 줄지어 헤엄치던 곳,

바위틈에서 주근깨 나리꽃이 가만히 내려다보던 곳,

고동, 파래, 성게, 군소, 해삼, 전복이 풍요롭던 곳,

친구네 할아버지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도

몰래 잘라 온 대나무 첨대로 동네 오빠들이

노래미를 잡고는 실망하던 곳...

그 예쁘던 곳을 기억으로만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금도 인정할 수 없는 건 무슨 까닭일까......

글 속 낚시터(바위)를 지나면 보이는 바위들(2002.9)

2002년 9월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