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 형제의 숨결이 흐르는 물돌이 마을
바람 끝에 묻어나는 서늘함이 등을 떠밀던 지난해 늦가을, 마음 한구석에 숙제처럼 묵혀두었던 안동 하회마을을 향해 무작정 길을 나섰다. 낙동강 물줄기가 태극 문양으로 휘감아 도는 그 신비로운 땅을 늘 동경해 왔지만, 선뜻 나서기는 어려웠다. 마침 전날 밤 TV 화면을 가득 채운 안동의 풍경은, 더 이상 여행을 미룰 핑계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계절의 끝자락에 걸린 만추의 정취가 짙은 갈색 톤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고즈넉할 것만 같았던 마을 안길은 의외로 분주했다.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길을 보수하고, 지붕에 새로 얹을 용마루를 엮느라 분주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장인의 손길 곁에서 짚단을 삼키며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투박한 기계였다. 덜컹거리는 기계음이 고요한 정취를 깨는 듯했으나, 이내 그 모습은 전통을 지켜내기 위해 현대의 힘을 빌리는 치열한 생명력처럼 다가왔다.
발걸음은 마을의 심장, 삼신당으로 이어졌다. 그곳에는 600년 풍상을 온몸으로 받아낸 느티나무 신목이 묵묵히 서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속이 훤히 패어버린 나무. 그러나 그 빈자리는 수많은 이들의 간절함이 묶인 하얀 소원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 살을 깎아내어 타인의 염원을 품고 버티는 모습은, 모든 것을 내어준 어머니의 품처럼 경이롭고 애틋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가 숨 쉬는 이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목화밭은 늦가을의 선물 같았다. 마른 잎 끝에 매달린 하얀 목화솜들은 몽글몽글 구름처럼 피어나 있었다. 찬 바람 속에서도 포근함을 잃지 않은 그 순백의 온기가 낯선 여행자의 긴장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대종가 양진당의 웅장한 기와 선과 서애 류성룡 선생의 정신이 깃든 충효당의 올곧은 기개를 지나, 나는 강변으로 향했다.
강 건너편에는 깎아지른 절벽, 부용대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웅장한 바위 절벽의 품 안 좌우로는 형제의 깊은 우애가 깃든 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 기슭에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머물며 징비록을 집필했던 '옥연정사'가, 왼쪽에는 그의 맏형 겸암 류운룡 선생이 학문에 매진했던 '겸암정사'가 서로를 마주 보듯 서 있다. 벼슬길에서 물러나 강을 사이에 두고 자연을 벗 삼았던 두 형제의 정신이 절벽 아래 흐르는 강물과 함께 억겁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돌아오는 길 강가에 서서, 나는 말없이 흐르는 낙동강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채움보다는 비움으로, 멈춤보다는 흐름으로 세월을 건너온 마을. 속을 비워 염원을 품은 느티나무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지키던 두 형제의 무언의 가르침이 강바람에 실려 왔다. 마을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길, 저 유유한 강물은 내 마음속에도 작은 물돌이를 일으키며 오래도록 출렁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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