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연못에서 수련의 새순을 따는 소녀.
평소 알고 지낸 베트남 사람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곳은 호치민시 동남쪽 변두리에 위치해 있으나 어느 지점부터는 비포장 도로를 지나 더 이상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논둑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야만 갈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 나라의 주요 교통 수단인 오토바이가 사라질 수 없는 원천은 바로 이런 여건 때문일 것이다.
벼 이삭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로 보아 멀지않는 추수를 예감할 뿐 이국만큼이나 낯설은 시골은 망망대해 늪지대였다. 길이라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논 둑길이 전부였다. 그러나 오랜 가뭄으로 더러 목마른 둑길은 소나무 껍질처럼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농가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갈했다. 군더더기 없는 농가 산림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정돈되어 있는 헛간을 둘러보지 않더라도 이 집 식구들의 깔끔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낮은 기온에 연꽃이 피지 않는 연못과 농가
처마끝에 이어진 관 아래로 물통들이 즐비해 있는 걸로 보아 우기 때는 빗물을 받아쓰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건기인데다가 수돗물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데도 그 많은 통속엔 물이 가득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물은 바로 앞에 있는 갈색 물이 찰랑 이는 연못에서 퍼 담은 물이라고 했다. 그 물의 찌꺼기가 가라앉고 맑은 물이 떠올라 식수가 되기까지의 시간 때문에 그 많은 물통이 필요했던 것이다.
연못에서 수련이 얼마큼의 물을 정화해줄지는 모르나 둑 하나를 사이로 화장실과 양어장이 있고 그 건너엔 오리 농장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아연케 하기에 충분했다. 주위가 모두 물바다이다 보니 비록 둑이 진흙으로 되어 있다지만 쌓인 둑 틈으로 물의 혼합일체를 이룰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오랜 건기중인 요즘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지기는 만무한데 여전히 물은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바다수면과 동시에 높아진 강물의 범람 때문이었다.

지붕이 없는 화장실
초등학교 사학년 겨울방학 때 우리가족은 섬으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비록 유년기를 그 섬에서 보냈다고 하지만 섬 생활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나는 그토록 그립고 보고 싶던 어린 날 옆집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을 무색케 했던 어느 바람부는 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바로 집 주위에 있는 말라버린 샘을 등지고 붉은 동백꽃이 둔탁하게 떨어지고 있던 숲속을 가로질러 엄마와 나는 빨래 통을 이고 보물섬을 찾아 나서야 했다. 이윽고 찾아낸 우리의 보물섬은 갈잎에 덮인 채 퍼낼 때마다 금세 흙탕물로 변해버린 빈약하기 짝이 없는 물 웅덩이 였던 것이다. 수돗물이 옥수처럼 눈부시게 쏟아지던 도시의 지난날은 환각이었을지언정 그 순간 그것은 끔찍한 기억이 되고 말았다.

오리농장
그런 절망의 나날이 섬의 가난한 물줄기만큼 메말라 버린 어느 순간부터 그 생활은 익숙해졌고, 식수로 사용하던 샘물은 언제나 동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의 몫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듯 섬에서 살아내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물을 아끼고 찾아내는 지혜와 부지런함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했던 것은 나눔의 실천이 아니었던가.
어느날 우연히 아랫동네의 낮은 샘물을 마셔볼 기회가 있었다. 그 맑은 샘물은 짭짜름하게 간이 되어있었다. 쓰레기와 얕은 기름띠가 유유히 유영 하던 바닷물 유입의 증거인데 알고도 모른체 사람들은 그 샘물로 한여름의 갈증을 시원스레 해갈하곤 했었다. 그런 문제를 제기할 기력마저도 남아 있지않는, 그나마도 귀한 샘물이었고, 그도 모자라 물을 찾아 배를 타고 나가야 될 만큼 그 섬은 목말라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농가의 주인집 딸과 친척아이들.
이즈음 새삼 느껴지는 것은 모든 물은 언제나 섞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다. 내가 보았던 어느 허름한 농가의 화장실과 오리농장의 악취에 뒤섞인 혼탁한 물이 사이공 강을 따라 흘러서 더러는 저 아랫녘에 있는 아름다운 서남 아시아 해변에서 까만 주검의 엄청난 가해자가 되었을 테고 그 가해자는 어느덧 우리고향 청정해역 그 푸른 물빛 속에 감쪽같이 뒤섞여 앙큼하게 옥 빛 파도가 되어 뒹굴고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안다. 아무리 깨끗하고 맑은 물이라도 내가 간절히 원할 때 곁에 있어주지 않으면 오만 잡균이 번식한 물보다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글.사진/애린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