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시

호수만큼 고독이 고이면

호수만큼 고독이 고이면

흘러버릴 샛강 한 줄

놓아야 한다기에

잃어버린 연장은 흔적도 없어

하얀 도화지 한 장 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이 오고서야

넓은 호수와

끝이 없는 샛강이 그려졌고

한 그루 포플러 나무와 풀꽃,

흰 구름이 떠가는 뒷산 하늘도

그려 놓고 싶어졌습니다.

그리하여

호수가 바다에 다다른 날

다시 찾아보겠노라고

추억도 없는 풀꽃을

텅 빈 벽장에 넣어두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문득

낡은 벽장 속 햇살 조각이 머문

낯익은 그림을 보게 되었지요.

흔적이라곤

어쩌다 다녀간 햇살과

햇살에 묻어온 먼지가 전부였으나

한 그루 포플러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포플러 나무 아래

풀꽃은 속삭입니다.

속살을 드러내던 호숫가

마른 덤불 바람에

슬피 울던 소쩍새,

바다보다 더 깊은 호수가

다시 호수를 이루고

강둑이 무너져

나 살아왔노라고...

고독이란 것은

저 푸름의 원천으로

마른 바람을 재워가는 것,

나도 한때는

작은 바람에 구슬픈

풀잎이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