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의 추억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그곳의 주인은
밤별 들이었던 것 같다.

‘세속의 묵은 때는 밤이슬에 씻어버리고 어둠에 말리면 그만'이라는
환청이 들리기도 했다.
외딴 집을 지키고 살고 계신 할머니는
가끔 지나는 나그네에게 막걸리를 파신다.
문패도 간판도 없어도
나그네는 그냥 지날 수 없음을 알기에
할머니는 오늘도 막걸리를 준비해 두셨다.
십여 년 전, 첫 인연을 맺고, 그곳을 스칠 때면 할머니를 뵈었다던 그니는
자신의 나이테는 망각한 채 할머니의 골 깊은 얼굴에 한숨짓는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다시 찾아 올 게요.”
그렇게 할머니 외딴집은 멀어져 갔고
그럴수록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의 산골 이야기가 궁금했다.
소멸해가는 것은 아쉬움이 있다.
고운 빛으로 남겨진 여운은
남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니던가.
나 살다가 그렇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온 내 길이 나 떠남의 흔적처럼
어둠에 지워지고 있다.
길도 없고, 길도 아닌,
산골 강변에 모닥불을 피우고
저편 우주처럼 우리별을 빛나게 했다.
어느새 풀벌레보다 먼저 깨어난 개구리는
어느 논둑을 지나고 있는지
부산한 울음이 멎질 않는다.

누굴 부르는 걸까....어딜 가려는 걸까...
밤이 깊을수록 이슬은 내 옷깃을 적시고
풀밭에 앉았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연들을 담고
강물 되어 흐른다.
그리움 되어 쏟아지던 유성들이 소멸 할 때서야
비로소 새벽은 빗장을 푸는 것을
지난 시간은 왜 그렇게 성급했을까.
밝을수록 드리워진 그늘은
시간이 걷어주고 있다.
채 떨구지 못한 이슬방울들이 반짝이는 풀 섶에는
찬란한 풀꽃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켠다.
그러느라 요란스런 들길은
온통 나를 반기는 이들의 천국이다.
깊은 산중이라 외로웠을까...
민박집 아낙은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붙잡는다.
"아이들 아빠는 전기 기술자인데 아이들 등하교 때문에 취직을 못해요.
걸어서 90분이나 걸리는 학교까지 통학할 버스가 없거든요.
멧돼지만 만나지 않으면 산나물 뜯는 재미가 솔솔 하답니다.
작년 어떤 분은 저 험한 앞산에서 송이버섯을 많이 채취했데요.
저 언덕에 내가 옮겨 심은 앵두나무가 지난봄에 참 많은 꽃을 피웠지요.
지난해 가을밤에는 떨어지는 밤송이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답니다."
참 좋다.
이 맑은 공기 향긋한 풀 내음...
저 푸른 산, 들, 강...
밤이면 앞뜰에 모닥불 피우고
내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꽃 피우면
소리 없이 내리는 밤이슬은
내 인연의 옷깃을 적시고
내 가슴에 남은 사랑을 적시었지.
그 밤은 홀로 잠들 수 없어
아침이 오는 거란다.
나를 볼 거울이 없다면
나는 내 얼굴을 알지 못하리.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를 보지 못하고서
어찌 너를 안다 할 것인가.
높아갈 수록
드넓은 평야가 손짓하지만
내가 쉴 수 있는 공간은
나 누워 잠시
저 하늘을 볼 수 있으면 되는 것을....
강원도 홍천강변에서. 2006.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