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포토에세이

그 여름날의 추억

내 유년을 향해 달리던 내 기억의 포말은 자주 내 고향 언덕에 올라 환각에 빠지듯 멍한 눈길로 앞바다를 그려놓았다. 바로 그 광경이 눈앞에 출렁이는데도 나는 여전히 환각 증세를 보이며 숲 터널로 빨려 들어갔다.

"이 터널을 지나면 무수한 몽돌들이 함께한 세월만큼 굴러서 둥그러진 바다가 보인단다. 그 옛날 어린 꼬마들이 바로 이 길을 따라 통학하며 제발, 비바람 부는 날은 오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너희들은 모르지? "

그런 나의 생각도 무색하게 느닷없이 까만 어미 염소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아기염소와 아이들이 서로의 어미를 부르며 서로를 피하느라 땀으로 목욕을 하고 그때서야 야트막한 언덕 사이로 그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는 솔밭 사이로 바다와 하늘이 서로의 빛을 닮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빛깔을 좋아한다. 늘 변함없는 내 기억의 뜰처럼 익숙하게 나를 받아들이며 세속에 휩쓸려 헝클어진 모습이 보여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다독이던 그 빛깔을... 때로는 나도 흡수되어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정녕 우리가 하나일 수 없었던 것은 다른 빛에 대한 환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아름다운 빛이 내 앞에 있어도 저울질 하게 되고, 또 다른 빛에 대한 미련을 갖다가 내 빛마저 잃어버리고마는..그때서야 나는 진지하게 외로움을 생각했다.

그래서 구름다리 그 큰 소나무는 저렇게 야위었을까.

숱한 방황의 날들을 보낸 후 사랑을 알았고, 그리움에 목마르다 이제 겨우 배운 기다림인데 그것이 너무 길었던 것일까. 휑한 눈길로 앞바다만 바라보는 소나무는 끝내 우리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어제는 참 오랜만에 꽃상여를 보았어요. 그 상여는 불꽃이 일 것 같은 마당을 노닐다 언덕을 넘어 쓸쓸히 떠나갔지요. 지금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그 너머만 할까요.

그렇게 고향에는 참 많은 분들이 떠나가셨다. 그리고 그분들이 떠난 후 잊혀져간 언니 오빠들이 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듯 그들도 그 섬을 기억할까. 그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요즘 고향은 새로운 길을 닦느라 한창이다.

먼 훗날 뱃길이 끊기어 섬과 육지가 하나 되면 옥토 사이로 난 비단길을 따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내가 넘어온 산길을 걸어 이작은 교정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정 뒤란 그 큰 나무 밑동 사이로 동그란 포물선을 그리던 연못은 흔적 없었지만, 바위틈으로 무수한 콩란들이 촉촉이 젖어 우리를 반기어주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색색의 코스모스가 하늘빛 받아 더욱 고왔던 도서관 계단은 현란한 아치 지붕이 이어져 있었다. 이쯤 어디엔가는 손도장 받아가며 나르던 자갈이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이윽고 마을로 이어진 학교 후문을 나와 그 이름도 어여쁜 채송화 담장을 만났다. 그 집 주인은 돌다리 슈퍼를 하다 이제는 민박집 아낙으로 살고 있었다. 새로운 돌다리 슈퍼 아낙은 지난날 이웃하던 얼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떠나는 우리에게 한사코 마실 것을 쥐어 주며 잘 놀다 가란다.

그래요...우리가 고향을 잊지 못한 것은 이런 정겨움 때문이지요.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언제든 다시 오라 손짓하는 고향, 우리가 언제고 아름다운 귀향을 꿈꾸는 것은 바로 이 포근함 때문이에요. 엄마 품처럼 변함없을 것 같은...

꿈속에서 그 골목은 언제나 미로였어요. 이쯤 어디엔가 친구네 집이 있었는데, 고만고만한 골목이 항상 장벽이었지요.

그리고 한 친구네 집 마당가에는 키 작은 동백나무가 크고 있었는데, 내 나이 스물다섯에 다시 찾은 그 집 마당에는 낯선 나무 하나가 그늘을 만들고 있데요. 나는 그때 그 친구도 보고 싶었지만, 그 친구와 어울리던 내 친구도 많이 그리웠답니다. 그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요. 아마 내가 맨 처음 가요를 좋아하던 것도 그 친구 때문 일거예요. 언제나 먼저 그곳에 가 있던 그 친구, 그래서 뒤따르며 아프던 시간이 있었다고 나는 아직 말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그 친구는 더 많이 아팠거든요.'

이윽고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저 언덕만 넘으면 우리는 그 물빛 같은 추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지워진 길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새 길이 너무도 반듯하고 당당해서. 그렇다고 어떻게 지난 길을 잊었다 할 것인가. 여전히 저 바다는 푸르고 순수한 물빛 그대로인데...

내가 그 물빛을 그리워했던 것은 나도 순수하고 싶어서이다. 순수의 마음으로 순수의 그들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다 결국은 순수와 살을 섞는...

순간 현기증이 났다.

깨어나면 모든 게 꿈일 것 같아서...

글,사진/애린(이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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