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산문·회상 2화

[회상-2]내 오래된 동화

조부모님께서 큰댁으로 거처를 옮기시면서 한 시절 우리 집이 되었던 웃서고지 초가집, 나는 그 집을 몹시도 아끼고 사랑했다.

우리집 새랍에 서면 바다와 섬 그리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노을이 사시사철 자리를 바꿔가며 참으로 아름다운 형상으로 다가서곤 했다.

온통 그곳에 마음을 뺏기며 살았을 때에도 묵묵히 우리 집을 지켜주던 돌담과 담쟁이가 있었다. 봄볕 무르익던 어느 날 어른 팔뚝만큼 굵어진 몸통에서 솟아오르던 붉은 싹은 어떤 곳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었던 귀함이라 하겠다.

바람 부는 날 안방에서 놀다가 쿵! 하는 소리에 우리는 자주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친구네 감나무 가지가 지붕까지 드리워진 우리집 뒤란에 설익은 감이 떨어지는 소리라는 걸 우리는 단박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감잎을 헤치며 풋감을 찾아내는 일은 우리자매에게 남 다른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높다란 굴뚝에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고 뒤란에 놓인 고무 통에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면 그날은 어김없이 엄마 손에 이끌려 우리는 월중 행사를 치러야했다. 담장 안에 은밀한 장소가 있어 참 다행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에 전화벨이 울리면 우리는 서로 받지 않겠다고 앞 다투어 물러서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웃서고지에서 한 대밖에 없었던 우리 집 전화기는 다른 동네와의 빠른 소통이었고, 그런 까닭에 전화를 받는 아이들은 이웃집으로 달려가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했다. 처음엔 전화벨이 울리면 우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가며 서로 받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아담한 작은 방이 있는데도 우리는 안방에서 모두 자는 걸 좋아했다. 온 식구가 자기에는 좁은 방이었으나 내 동생과 나는 발밑에 누워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대다가 잠들곤 했다.

안방에는 엄마의 유일한 사치품 자주색 삼단 자개화장대가 있었는데 엄마는 화장대 맨 꼭대기에 겨우내 고구마 싹을 키우는 것을 좋아했다. 연두색 이파리가 또 다른 곳으로 잠식하기도 전에 누렇게 말라가던 떡잎마저도 꽃처럼 곱고 예뻤다.

어느 해 부터였는지 우리 집 화단가에 소국이 자라고 있었다. 숱이 많던 가지에 꽃봉오리가 도톰해지면 가지는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휘청 거리곤 했다. 이윽고 소국이 만개하고서야 한참동안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는 마침내 파리해진 하늘에서 불어온 바람에 서서히 말라가 버렸다. 그래도 우리 집 소국은 초라하지도 처량하지도 않는 내안의 잔잔한 떨림이었다.

햇살 좋은날 양지바른 담장 가에 앉아 이엉을 엮으시던 울 아버지는 남인수님의 ‘애수의 소야곡’을 자주 틀어두시곤 했다. 행복이라는 울타리가 질긴 칡 줄기로 엮인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겨우 몇 해를 넘기시더니 이른 봄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던 날 황토마당에 내려앉은 꽃상여를 타고 뒷산마루 푸른 솔밭 길로 오르셨다.

아득히 멀어져간 유년시절에 한밤중에 깨어난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그 솔밭 길을 따라 오른 적이 있다. 그날은 여수에 사시선 엄마께서 잠시 다니시려 오시어 나는 분명 엄마 품에 잠들었는데 문득 깨어보니 어둠속에 갇힌 새가 되어있었다. 나는 곧장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헤치며 달려는지 날았는지 한참을 올라 나지막이 쌓여진 돌담 가에 서서 할머니 밭을 향해 목청껏 ‘엄마’를 불렀다.

아무리 불러도 되돌아오는 것은 솔밭을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뿐이었다. 그때서야 잘못된 내 길을 감지하고는 날개 다친 어린 새 마냥 파닥거리며 급하게 산길을 내려 와야 했다.

지금도 나는 산길을 오르곤 한다. 어쩌면 내 부모님은 이른 새벽 솔밭 길을 따라 산 밭 어디선가 김을 매고 계실지도 모른다. 이 몽환적인 순간에도 세월은 흘러가고 나는 가끔 내가 서 있는 낯선 현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