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산문·회상 3화

[회상-3] 유년의 숲

내가 탄 배가 떠나가는지 육지가 떠나는 건지 내 눈으론 구분할 수 없었던 겨울날이었다. 우리 식구가 탄 배는 또 얼마큼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냈는지 모른 채,  우리는 드디어 우리 섬에 도착했다. 우리 식구들이 오랜 객지생활의 종지부를 찍던 날이었다.

그리 많지 않던 새간살이 중에는 엄마가 귀하게 여기시는 삼단 자주색 자개화장대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몫이었고, 우리남매도 부모님을 도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짐을 들고 엄마 뒤를 따랐다. 그런데 엄마는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길을 따라 한없이 올라가셨다.

이윽고 웃서고지 할머니집 새랍이 보이는데도 앞선 엄마는 곧장 동백낭구 모퉁이를 돌아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고 계셨다. 그 순간 불길한 생각이 엄습해 오긴 했어도 내가 든 새간 살이 무게를 앞서지는 못했다.

마침내 좁은 오솔길과 아치를 이루는 동백나무 터널을 지나자 잠시 숲이 비켜간 하늘아래 낮은 무덤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휘어 돌아 곧장 가리키는 방향에 높다란 돌담이 막다른 숲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중학교를 진학해야 하는 오빠만 남겨진 여수에서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이다. 처음 고향으로 간다고 했을 때의 설렘이 하늘을 빼곡히 가린 동백 숲에 그늘져 빛을 잃는다 해도 내 찬란한 유년의 숲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높은 동네였던 숲 속에는 윗집과 아랫집이 있었는데, 우리는 아랫집 아래채에 새들어 살게 되었다. 내 정든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게 되기까지 일 년 남짓한 시간을 그 숲속의 작은 아래채에서 살게 되었는데, 나는 먼 훗날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면서도, 베트남 고무나무 군락지를 스칠 때도 그 숲속을 생각했다. 혹시라도 내 안에 서정의 물줄기가 흐른다면 그것은 바로 그 숲에서 나는 샘물의 흐름일 테고, 그 푸른 물은 속절없이 말라가는 내 마음을 자주 적셔주었다.

숲속 아랫집 돌담에는 포도나무가 끝없이 넝쿨져 오르고, 뒤란 양지바른 언덕에는  앵두꽃이 눈부셨다. 그리고 앞마당 화단가에는 수국이 넓은 땅을 품으며 몸집을 늘리는데, 수국이 지기까지 오묘한 색의 조화가 흐른다는 것을 그때처음 알게 되었다. 새랍을 빠져나와 오른쪽 돌담 모퉁이를 휘어돌면 동백나무 밑둥치에 작은 샘이 있었는데 그 샘물 빛깔도 그러했지만, 그 샘가 아름드리 동백나무에서 들리던 동박새 소리야말로 청아한 바람소리를 닮아 숲속의 적막한 기운을 자주 밀쳐내 주곤 했다.

샘을 뒤로하고 좁은 풀길을 따라 곧장 걸어가다 보면 마당널이라 불리는 넓은 평지가 있었다. 그 주위에는 잘 정돈된 윤씨집안 묘지가 있었는데, 그곳에 푸른 잔디가 고운 빛을 발하면 동네 사람들은 음식을 들고 그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햇살에 목욕한 나뭇잎이 산들바람에 찰랑거리는 숲속 잔디밭에, 온 동네 사람들이 왁자지껄 둘러 앉아 점심을 먹던 풍경을 회상 할 때면,  그것은 어쩌면 꿈에서 본 풍경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뻐꾹새 울음소리 따라 마당널에 누렇게 보리가 익어갈 때면, 넓은 보리밭에 숨은 암꿩이 느닷없이 날아가곤 했었다. 꿩이 비상을 시작하는 그곳으로 일제히 깡총거리며 달려가보면 그곳엔 어김없이 꿩알들이 따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그 광경을 같이 보았던 내 친구는 바로 윗집에 살았는데, 그 집은 정말 대가족이 함께 사는 종갓집답게 넓은 마당과 높다란 장독대와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푸른 정원 속에 집을 짓고도 그 안에 작은 연못과 어우러진 예쁜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키 큰 돌배나무가 서 있는 친구네 새랍을 빠져나와 돌계단을 따라 걷다보면 여전히 그곳은 어둔 숲이었고, 그 숲과 이어진 들길을 따라 걷다보면 곧장 안도로 향하는 푸른 솔밭길이 나왔다. 그 길에서 여린 산자고 꽃이 거친 바람에 떨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땐 그 꽃이 그곳에 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마당널 짜밤나무는 여전히 건재한지, 그 숲속 샘가에 피었던 개복성 꽃은 지난봄에도 눈부신 꽃비를 내렸는지. 그곳의 안부가 궁금할 때면 나는 곧장 달려가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정말 그것은 환영이었을까 싶게 그 숲속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우리가 걷던 작은 길들도 흔적이 없다.

그래도 내 아름다운 귀향의 꿈은 유통 기한이 없다.

그리운 동산에 찬란한 내 유년의 숲이 숨어있고,

내 간절한 마음이 그곳에 닿는 동안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