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산문

마른 잎을 떼어내며

다육식물들이 힘이 들어 점점 체형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화분 갈이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시도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분 갈이는 하나의 예술이라고 간주함에 따라 심혈을 기울이는 바람에, 분갈이가 마무리되면 언제나 진이 모조리 빠져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다육식물은 화분과의 조화, 또는 색깔과 수형에 따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다육 식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갈이의 묘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식물이 희귀해지는 것은 공급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허다한데, 귀해서 비싸다 하니 그런가 보다고 생각할 뿐이지, 딱히 내 마음을 끌어당기지는 않았다. 작고 보잘것없어도 주인의 정성에 세월을 먹으면, 묵은 둥이가 되고 멋진 수형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다육이에게 푹 빠져서 주말마다 다육 농장을 돌아다니던 내 친구 부부는, 일 년도 안 돼서 두 손 두 발을 들고는 고사 직전의 다육이들을 내게 몽땅 안겨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공호흡에도 소생이 안 되는 다육이들이 너무 많았다.

식물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갈이의 재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손끝으로 다시 생기를 찾고 단아한 표정으로 슬쩍 꽃대라도 올려주면 더 바랄 게 없는 뿌듯함에 보고도 또 보고 싶어 진다. 다육이에게 달달 구워졌다는 말은, 수분의 궁핍과 빛의 세례와 얼지 않을 만큼의 추위를 견뎌낸 다육이만이 부여받을 수 있는 가치인데, 우리 집 다육이들은 구워지기를 넘어 잎맥마다 쪼글쪼글한 주름이 선명하게 패어있었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주인의 무관심이 제일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다육식물은 너무 허기지면 흙 속의 뿌리를 의심하고, 위의 줄기에서 새로운 뿌리를 아래로 내리거나, 제 몸의 맨 아래 잎의 수분으로 버티는 긴축재정에 들어간다. 그동안 다육이는 말린 잎들을 떼어낼 기운조차 아꼈는지, 브라운 레이스 스커트를 켜켜이 입고 있었다. 생명이 식어버린 낱장을 포기할 때마다 쿵, 내려 앉았을 다육의 마음이 전해진다. 이대로 간다면 남부러울 것 없을 거라고 자신만만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이만하면 다행라는 안도에 두 손을 모으던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내 노력과 상관없는 일이 도미노처럼 달려와 뒤통수를 칠 때도, 곧 나아질 거라는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며 산다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맨 아래 잎부터 잘라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데, 미래가 흔들리고 있다는 시나리오가 너무 그럴싸해서 마음이 자꾸만 움츠려 든다.

돌아보니 쉬운 계절은 하나도 없었다. 걱정이 사라진 골목에서 새로운 그늘을 걱정하며 걸어온 자국들이 또렷하다. 오랜 장마의 기로에서, 폭염 속 눅눅한 습도에서 끊임없이 살아난 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돌보던 마음 볕들은, 내가 존재하는 동안은 싱싱한 내일이 보장되어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 식물들의 생존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주인이 새로운 재미에 눈을 돌리고부터였다. 창창한 앞날의 지반이 소리 없이 부석거리고 있다는 불안을 떼어내기 위해 우리는 설마에 더 집중했는지 모른다.

화분 속 뿌리가 너무 가득 차서 뿌리가 뻗어갈 공간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추락한다는 의미이다. 그 답답한 아우성을 잘라내며 사이사이 고인 퇴물들을 털어내고 마른 잎을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틀어진 수영을 잡아 그에 어울리는 화분을 골라 입주를 시킨 지 이틀 만에 다육이는 몰라보게 화색이 돈다.

희망이 실눈만큼만 보여도 희망적이라고 한다. 참 좋은 계절은 반듯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갈증의 시간을 견뎌낸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며칠은 좀 과하게 푸르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