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산문

덕분에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산문)

어디선가 들려오는 전자음 소리에 무심하다가 한참만에 소리를 따라 베란다에 나가보니 세상에~! 빨간 에러코드를 반짝이며 세탁기가 멈춰 있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아찔한 멘붕이 부풀었다.

그 속에는 하필 한파 주의보가 한창인 날, 무슨 생각에 빨지 않아도 될 옷가지를 잔뜩 넣고 돌리다가 이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내 연달 없는 자책도 포함되었다.

세탁기의 이상 반응을 진즉부터 감지하고도 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서둘러 세탁기 속에 갇힌 빨래부터 꺼내고, 이리저리 작동 버튼을 눌러보지만, 역시나 요지부동이다.

잠시의 고민도 금방 풀려 두 개의 선택 중 하나를 버리고 집 근처 대형 매장으로 갔다. 그런데 새로운 세탁기가 우리 집에 도착하려면 이틀이 걸린다는 직원 말에 어정쩡한 웃음만 새어 나온다.

세탁기를 너무 오래 사용한 데다가 서비스를 불렀을 때 마모된 부품으로 소요되는 시간과 수리비 등 부정적인 요소만 잔뜩 나열하며 선택한 건데, 결국 해결되지 않는 만족만 달랑 매달고 집으로 돌아왔다.

베란다 귀퉁이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는 빨래의 무게는 장난이 아니다. 일단 반만 덜은 빨랫감을 대야에 나누어 욕실로 옮긴다. 옷들이 어찌나 무거운지 욕실 의자에 앉아 빨래를 헹구는 내내 아이쿠! 하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온다. 편리에 익숙해진 몸이 자꾸만 멈추겠다는 의욕을 끌어올리느라 게으른 거품을 낸다.

그 옛날 우리 엄마는 돌담 건너편 댓잎이 아침 햇살에 달라붙어 방문 창호지 화면에 그림자놀이를 하기 전에 빨래통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러고는 한참 단잠에 빠져있는 우리를 부르셨다. 항상 급한 엄마는 단번에 내 이름을 부른 적 없다. 종. 충 .정 . . .여수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오빠만 빼고 우리 남매 '앞' 자만 불러 놓고 엄마는  또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지셨다.

이불속에서 이리 뒤적 저리 뒤적이다가 깨어있으면서도 자는 척하는 동생에게 빨래 널로 나가자고 흔들었다. 우리 동생은 역시나 엄마를 닮아서 단번에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아 ~안~해~ 시~이~러~ 나는 두어 번 정도는 사정하지만, 더 이상은 부르지 않는다. 뒤늦게 동생이 방문을 열고 가까이 다가와 턱밑에서 부스스한 두 눈을 깜박거려도, 나는 못 본 척 씩씩 거리다가 혼자만 힘이 든다. ㅎㅎ

하지만 대부분 우리 자매는 환상의 콤비다. 돌아가신 대형 문어같이 축 늘어진 윗도리 양 끝을 붙잡고 서로 어긋나게 비틀어 짜는 일은 정말 둘이 아니고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우리가 널어둔 빨래가 공중에서 영하의 기온을 만나는 날은 빨래도 완전히 울트라급 깁스를 하는 날이다. 젓가락 같은 가느다란 고드름을 일제히 매단 옷들은 그대로 멈춰라~!의 마법에 걸려 내가 한쪽 팔을 툭 치기라도 할라치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옷은 엄마 손에 이끌려 가마솥뚜껑 위에 풀어졌다가, 안방 아랫목에 누어 노곤했다가, 무사히 우리의 옷이 되어주었다.

자연스레 떠오른 옛 시절이 내 엄살을 쥐어박는다. 호강에 겨운 나태에 마음이 찔려서 나머지 빨래까지 후련하게 끝낸다. 탈수되지 않은 겨울 빨래가 공기 멈춘 베란다에서 마르기는 얼마나 벅찬 일인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가벼워지지 않은 옷을 만지며 새삼 깨달았다.

세탁기는 다행히 일찍 배달해 달라는 내 부탁을 들어준 덕분에 첫 배송 번호를 얻었다. 그런데 세탁기가 물류 창고에서 오랜 날 떨다가 왔기 때문에, 바로 사용하면 벨트 등 여러 부속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내일쯤 사용해야 한다는 배달 기사님 당부가 이어졌다. 온도에 의한 무리라면 베란다에 가득 찬 오전 햇살에 뜸 들이다가 오후에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내 생각을 그대로 밀어붙인다. 덕분에 건조대에 물먹은 채 이박 삼일을 견딘 빨래는 다시 헹구어지고 탈수되었다.

내가 불편해지는 것만 생각하다가 13년 동안 몸 바쳐 헌신한 세탁기에게 그동안 고마워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떠나보냈다.

내 삶에 집중하다가 허투루 넘긴 이별식이 어디 세탁기에게만 있었을까. 너무도 가까이에서 알게 모르게 나의 온기가 되어준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어쩌면 주위 모든 분들이 듬직한 세탁기가 되어준 까닭에 내 안락은 삑삑 소리를 내며 덜컹거리다가도 다시 힘을 내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