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시

백지의 향방

괜찮은 줄 알았는데

가슴에선 진물이 흐릅니다

써 내려간 지면의 끝이 고작

만질 수 없는 얼굴이라면

기다림을 잘못 안 까닭입니다

오랜 세월 형벌 같은 단절을

의연하게 견디었다고 해서

베인 상처에 핀 눈물꽃이

후드득 떨어진 건 아닙니다

그대가 쓰다만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채우겠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길을 걸어가고

나는 내 길을 적다 보면 우리는

안개 나라로 떠날 수 있습니다

멍울진 가슴 하얗게 풀리면

사랑이라는 이름은 길을 잃고

이생의 슬픔은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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