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습성


며칠 전, 밖에서 식사를 하다가 뿌리칠 수 없는 식탐에 구속되어 소화를 시킬 겸 개화산 둘레길까지 걷게 되었습니다. 그 곳으로 갈 때마다 길에게 약속을 합니다.
“다음 주 또 올게요”
하지만 길은 오랜만에 도착한 저에게 픽, 토라져 한마디 하는 것 같습니다.
“약속이나 말 것이지, 다음 주가 1년인가요?”
저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처음 온 것처럼 구석진 자리까지 자세히 훑어봅니다. 그래서 개화산은 저를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습니다.
초입부터 너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소나무들이 보였습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첫눈치고 너무 많이 내린 습설(수증기를 많이 품은 눈) 때문이라는 것을 얼마 안가 깨달았거든요. 잎을 떨군 낙엽송들은 멀쩡한데, 꺾이고 쓰러진 나무는 소나무뿐이었습니다. 잎이 촘촘하기 때문에 겨울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목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 개화산 소나무를 [변하지 않는 습성] 이라는 시로 완성하였는데, 소나무에게는 좀 미안합니다. 시의 시나리오는 대충 아래와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지인(소나무)이 지난한 과거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느 정도 재산도 축척되었으니, 앞으론 일도 줄이고 재미있게 살겠다고......그런데 그 지인은 이제 정상 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장기 불황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그 지인(소나무)의 이웃(참나무)에게 지인(소나무)의 근황을 물어보게 되었다.
참나무의 말에 의하면,
얼마간 편하게 사는가 싶더니, 누가 급하게 부탁한 일을 한사코 해내면서, 과로로 쓰려졌다는 것이다. 중간에 몸 생각도 하면서 일을 하라는, 참나무의 조언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이야기 하다가, 작년에 부족함 없이 살면서 일만하던 친구(소나무의 친구)의 갑작스런 부음에 크게 상심한 그분(소나무)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다 이런 저런 일들로 하여, 가진 건 없지만, 여전히 건강하게 살고 있음에 참나무는 감사를 느낀다. 그 순간, 줄곧 매고 온 근심이 사라진다. (근심 한 장, 무형의 위치로 배치된다)
이렇게 의미가 통하는 시적 묘사 한 줄을 찾고 나면, 저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 굶었냐고요? 네~ㅎㅎ
잎을 다 떨구고도 조급해하지 않는 참나무나, 가득 찬 잎을 가지고도 채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소나무나 제 습성대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다른 길을 갈구해도 살아온 날들이 다듬어 둔 습성은 고집을 내려놓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거든요.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모두 알기엔 주어진 삶이 너무 짧고, 내 가뿐 숨에게 쉼표를 주는 순간은, 오롯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니까요.

변하지 않는 습성 / 이종희
개화산 기슭, 사철 푸르던 소나무
왼쪽으로 몸을 꺾은 채 미동이 없다
얼마 전만 해도 등껍질 쩍쩍 갈라진 길을 회상하며
가능한 유연하게 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도대체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장기 불황에 우둠지까지 그늘을 올린 참나무에게
소나무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폭설이 내리던 밤이었어요
평소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소나무는 갑자기 얼굴이 환해져서는
함박눈이 내리는 쪽쪽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짊어지는 겁니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밤잠을 미루길래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고 가지를 흔들었는데
잎을 탈탈 털린 이의 언어는 시시하다며 귀를 막더군요
결국 우지직 소리와 함께 주저앉아버린 날이
뜬 눈으로 사흘째 보낸 날이었나 봐요
지난해, 남보다 더 많은 잎을 가지고도
빈번하게 밤을 새운 친구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너무 상심이 크던데, 아무래도 소나무는 잊고 있었나 봅니다
줄곧 참나무 어깨를 누르던 근심 한 장,
갑자기 무형의 위치로 배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