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칼럼·서평

[서평] 사랑은 사랑을 낳고

클리어 키건의 작품은  함축의 단계를 거쳐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줄이고 줄여 98 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남겼지만 [맡겨진 소녀]는 천천히 곱씹어 읽어야 제맛이 난다.

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에서 태어난 클리어 키건은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영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가디언>은 그녀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는 그가 25년간 활동하면서 5권의 책만 냈는데 그 모든 작품이 얇으면서 예리하고 우수하기 때문이다.

2009년 쓰인 [맡겨진 소녀]는 데이번즈 문학상을 수상했다. ‘양동이와 그 안의 물에 반사된 소녀의 모습’이라는 키건을 사로잡은 한 이미지에서 비롯한 맡겨진 소녀는 출간 이래로 아일랜드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아일랜드에서는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2022년 콤베어리리드 감독에 의해 영화 [말없는 소녀]로 제작되기도 했다

집안일에 지친 엄마의 출산을 앞두고 소녀는 먼 친척 집에 맡겨진다. 어떤 저항도 먹히지 않은 진공상태의 공기방울에 갇혀 이송된 소녀는 낯선 환경과 맞닥뜨린다.  그곳에서 경험하지 못한 킨셀라 부부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집이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마음을 무겁게한다. 예의 바르고 가능성이 충분한 인격체로 변화해 가는 한 소녀의 찬란한 여름 방학 때의 이야기를, 작가는 한정된 공간에 숨죽은 감각을 일깨우는 영롱한 문체를 뿌려 읽는 이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1] “나는 캄캄한 침실에서 다른 여자애들이랑 같이 누워 아침이 오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 이야기를 나누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p11

소녀는 주변 사람들과 살가운 관계를 갈망하지만, 삶에 지친 엄마도, 자식들에게 관심 없는 아빠도, 사랑을 알지 못한 언니들도,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도, 모든 것에 서툰 자신도, 서로 마음을 포갤 방법을 몰라 자신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지상에 꺼낼 수 없다.

[2]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p30

소녀의 마음에 저장된 아빠는 차라리 투명인간이면 다행이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제멋대로인 사람, 사랑 없는 아빠에게 해방된 기분은 정말 맑고 청아하다. 소녀의 기분을 짠하게 응원하다가도 올인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아빠도 그런 아빠 밑에서 자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척박한 환경에서 성장하고도 인정을 베풀 줄 아는 어른은 더욱 귀하고 특별하다.

[3] “매트리스가 낡아서 말이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이렇게 습기가 차지 뭐니. 항상 이렇다니까. 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p36

첫날밤 실수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소녀에게 이보다 큰 포용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소녀는 자신의 실수를 잘 알고 있다. 난처하지 않도록 어린 마음을 세심하게 살피는 아주머니 연기가 뭉클하다. 나잇값을 못한다는 흔한 말 중에는 이런 어른다운 인내와 기다림과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행동에서 오는 절망을 이해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4]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이 편안함이 끝나기를 –축축한 침대에서 잠이 깨거나 무슨 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 – 계속 기다리지만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 p45

전에 경험하지 못한 충만된 일상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불안하다. 차라리 깨어날 꿈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깨어나고 싶다. 그만큼 지금 소녀는 구석진 공간까지 미소가 번지는 삶속에 들어가 있다.

 [5]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공기에서 뭔가 더 어두운 것, 갑자기 들이닥쳐서 전부 바꿔놓을 무언가의 맛이 난다. p57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자신 탓이 아님을, 자신에게도 충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음을, 진심은 어떻게 통하고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비록 어린 나이지만 충분히 깨달았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기는 정말 싫다.

[6] 일주일 동안 비가 내리고 나서 목요일에 편지가 온다. 놀랍기보다 가슴이 철렁하다. p76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결국 이곳을 떠나야하는 시한부 일정이 적힌  엄마의 편지가 도착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p79

진심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는 어떤 쓴 말도 달콤하게 삼켜진다. 세상에서 제일 깊은 유대 관계를 맺은 인연과의 분리는 그래서 더욱 불안하고 서럽다.

[7] 나는 눈앞에 날을 가만히 바라본다. 여느 날과 똑같다. 마당 위로 평평한 하늘이 걸려있고 축축하게 젖은 개가 현관문 앞에서 보초를 선다. p82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를 상상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어둡고 칙칙한 공기가 더욱 도드라져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움트는 변화를 소녀는 인지한다

[8]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p96

어른이 되어도 때때로 놓치는 삶의 이치를 소녀는 킨셀라 부부로부터 배웠다.

타인을 의식하고 배려하는 곳에 침묵의 소중함을, 그래서 소녀는 덜 상처받고 단단해져서 당당하게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감한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p98

킨셀라 아저씨 품에 안겨 다가오는 아빠를 보고 있다.

킨셀라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며 내 아빠가 되어 달라는 마음과 다가오는 아빠에게 예전처럼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경고로 읽히는 중의적 표현이다.

소녀는 이제 그늘을 고스란히 떠안고 성장하는 예전의 소녀로 돌아갈 수 없다. 사랑이 사랑을 불러오는 들녘의 꽃들은 저 혼자 꺾이고 휘어지게 내버려 둘 만큼 마음이 차갑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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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접하게 되면서 [말 없는 소녀]라는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극적인 반전이 있거나 디테일한 스케일이 있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단숨에, 다음에는 한 문장 한 문장 꼭꼭 씹어가며 읽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만큼 문장이 아름답고 사고를 쫀득하게 한다.

마지막 킨셀라 아저씨에게 달려가 안기는 장면에서 자동으로 눈물이 팡 터져 나왔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노래 가사도 무색하게 세상에는 속수무책인 아이들이 많다. 그리고 사랑 없이 성장하여 여전히 사랑을 찾아 헤매느라 마음이 허한 어른들이 많다. 그런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다. 내가 끌고 왔다고 절망했던 암묵색 그늘은, 사실은 내 것이 아니었다고, 충분히 우리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었고 훌륭하게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노라고...... 잔잔한 울림으로 어디엔가 두고 온 상처받은 내 어린 영혼을 맡겨진 소녀는 가만히 어루만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