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산문

꿈이었을까

서고지와 부도 @2001

외할머니께서 하늘품에 안기시고 외삼촌 가족이 여수에 뿌리를 내리기로 정하시면서 외갓집은 우리 집이 되었다.

이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도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이 겨울 방학을 맞아 섬으로 내려왔다.

“내일 안도 해수욕장 가서 라면 끓여 먹고 놀다 올까?”

 한 친구의 말에 우리는 라면값을 모아 점빵집 친구에게 전달했다.

“냄비는 내가 가져갈게”

얼마 전 엄마가 여수에서 사 온 반들반들한 은빛 냄비가 아버지가 달아놓은 부엌 선반 비닐 속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튿날, 성벽 같은 돌담을 휘어 돌아 좁은 돌계단을 따라 올랐다. 아버지가 틈틈이 칠해놓은 파란색 슬레이트지붕이 보이고, 동생이랑 만든 작은 화단도 보인다. 돌담이 낮은 왼쪽 비탈진 밭에는 듬성듬성 봄동이랑 시금치가 뒹굴고, 오른쪽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는 작년 가을에 피어난 억새꽃이 겨울바람에 많이 홀쭉해졌다. 도시 물이 잔뜩 오른 한 친구가 도시를 신나게 풀어놓았다. 그사이 알마도가 보이는 평지의 작은 오솔길을 스치고, 우리는 숲 속에 있는 검푸른 새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고지에서 안도로 가는 길은 윗길과 아랫길이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이 아랫길이 좀 낯설다. 안도로 가는 길은 윗서고지에서는 고개를 넘어야 하지만, 아랫 서고지는 계단 끝에 있는 평지를 걷다 보면 나온다. 하지만 많은 구간이 나무들이 감싸 안은 으슥한 길이다.

이윽고 마지막 동백나무 아치 터널을 지나고, 윗길과 안도로 가는 길이 니은 자로 열렸다. 너무 익숙한 길이라고 만만하게 보아선 안 된다. 왼쪽 바닷가 빈지 쪽은 애기 무덤인 독담불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고, 조금 더 가다 보면 본연의 얼굴과 손발이 무너져 내린 사람이 살았다는 조그마한 토굴이 있다.

아침 공기에서 어떤 냄새가 날 때 구절초가 피고, 오강딸기는 어디에 숨기를 좋아하는지, 그 길에서는 왜 정금나무가 다부지게 자랄 수밖에 없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길은 좁고 돌들은 제멋대로 뒹굴고 있지만, 내리막이어서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야포 포구가 가슴을 활짝 풀어 동그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 언덕에서만 볼 수 있는 저 예쁜 풍경을 본동, 이야포, 오지암, 상상동, 동고지 친구들은 잘 모른다.

구름다리를 지나면 이야포 남자애들이 항상 머물던 자리가 있다. 친구들은 그곳을 향해 저마다 원망 섞인 말 한마디씩 꺼냈다. 그 애들 때문에 국민학교 하굣길은 험상궂은 장애물을 통과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언제 빠져나갔는지 모르게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데 뭉쳐 지나가는 서고지 여자 친구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했다. 하지만 누구도 돌멩이에 맞지는 않았다. 서고지 사는 친구는 여자 일곱 명, 남자 두 명이 있었다. 나중에 부도분교가 폐교되면서 여자 한 명, 남자 두명이 합류했지만, 우리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본동 남자애들은 이따금씩 이야포 마을을 스쳐 예쁜 친구들이 많은 서고지로 향했다. 그 애들의 행선지는 늘 골방에서 혼자 라디오를 뜯었다가 다시 원상복구 하면서 놀고 있는 남자 친구네 마당이었다. 당연히 그게 위협이 될만한 이유는 아닌데, 이야포 남자애들은 한번도 서고지를 넘어 오지 않았으면서 우리에게 심술만 부렸다.

이야포 마을을 지나고, 초등학교 운동장, 두몽안, 본동, 빼금을 지나고, 한참 동안 오르막을 오르자 동고지가 푸른 동해를 향해 기다랗게 누워있었다. 자주 귀신이 나타난다는 동고지 길이 고스란히 드러나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가 밀려간 모래밭으로 달려갔다.

 저 바닷가 자갈을 우리가  교정 뒤란으로 다 옮겨버려서였을까, 넓은 백사장 모래입자가 너무 곱고 반듯했다. 그 순수의 모래밭을 바다도 함부로 만질 수 없는지 가만가만 왔다가 멀어졌다.

우리는 들고 온 라면이랑 냄비를 한 곳에 모아 두고 나뭇가지를 주워 바다가 자리를 비켜주면서 다져놓은 모래밭에 삼팔선을 그렸다. 오징어게임을 하고 사방놀이를 했다. 깡충깡충 뛰어노는 친구들 모습이 살이 포동 하게 오른 토끼 같았다. 너무 오랜만의 놀이가 신나고 재미있어서 아무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는 파도에 밀려와 동산에 뒹구는 나무를 주웠다. 냄비가 들어앉을 수 있을만한 돌화덕을 만들고 불을 피웠다. 돌에 올린 양수냄비에서 물이 끓어오르자 라면과 수프를 넣었다. 젓가락으로 휘휘 젖던 친구가 이제는 다 되었다고 말했다. 일제히 냄비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데, 갑자기 푸시식! 소리와 함께 솟구친 연기가 한껏 들뜬 친구 얼굴을 삼켰다.

"옴마야!~"

누구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려났다가 다시 돌화덕에 붙었다. 화덕 안에 한쪽으로 기운 냄비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플라스틱 손잡이 한쪽이 녹아 사라졌다.

"냄비에 남은 라면이라도 먹자!"

누군가가 말했다. 약간의 실망을 흘린 친구들은 먹을 수 있는 라면을 다행으로 여기며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나는 먹고 싶지 않았다. 그 반짝이던 냄비가 새까맣게 그을린 것도 모자라  녹아 떨어져 버린 손잡이.... 남은 건 엄마한테 혼날 일뿐이었다.

나는 빈 냄비를 들고 민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서 모래로 문질렀다. 그을음이 모래와 내 손에 찰싹 엉겨 붙어 번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수세미를 들고 냄비를 박박 문질렀다. 그을음은 많이 사라졌지만 플라스틱 손잡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고 마실 가신 엄마가 돌아오셨다. 나는 거의 울상이 되어 엄마한테 이실직고했다. 그런데 엄마는 산더미 같은 내 걱정도 무색하게 별말씀이 없으셨다. 한쪽 손잡이가 없는 채로 우리 집 곤로위에 앉아있는 냄비를 볼 때마다 불편했던 마음도 내가 모르는 사이 지워졌다.

세월이 흘러 엄마의 어릴적 이야기를 듣다가 동네에서 유명한 왈패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랫길을 따라 등교를 하던 아이들은 그 왈패가 보이며 무조건 멈춰야 했다. 그리고 맨 앞으로 나선 왈패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했다. 도착지는 언제나 학교가 아니라 산이었다. 왈패는 그곳에 모인 아이들과 엄마들이 싸준 도시락을 먹고 놀다가 하교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끔은 외할머니한테 들켜 많이 혼났다고 했다. 그 왈패가 바로 우리 엄마셨다.

엄마의 걱정도 그때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잘못을 해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으면 외할머니는 그냥 넘어갔고,  잘못을 해놓고 별일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 날은 많이 혼났다고 하셨다. 그런 징크스가 평생 엄마의 정신을 지배했다. 엄마는 가족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걱정을 습관처럼 끌고 다니셨다. 하지만 이승의 짧은 소풍을 끝낼 무렵 하신 말씀은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았다"였다.

작년 여름휴가 때 늘 그립던 옛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가 심어두었던 수국이랑 앵두나무는 여전히 잘 크고 있는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마당 가득 꽃불을 켜던 채송화는 지금도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지,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의 손때 묻은 흔적이 더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손수 대패질하여 만들어둔 널따란 마루는 얼마나 늙었을까, 다크브라운이 가득한 주방 한쪽에 만들어진 그 싱싱한 원목의 선반에는 무엇이 있을까, 오른쪽 처마를 돌담 쪽으로 늘리고 키운 작은방 마루는 지금도 건재할까.....

너무 반듯한 길이 새롭게 놓인 도로 끄트머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부도를 잇는 다리가 신선한 조망으로 우뚝 서 있다. 서너 걸음만 옮기면 서울 오신 엄마에게 콩을 딸 시기를 압박하던 우리 텃밭이 있다. 그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가 살던 집이 나온다. 높다란 담의 흔적은 있는데 돌 사이사이를 장악한 잡목들이 방향을 잃게 한다. 좀 더 걸어 안도 가는 길까지 가보기로 했다.

친구네 새랍 대나무 울타리를 등지고 돌아서는데 짙은 초록이 아득했다. 길이란 길은 밀림으로 뒤덮여서 예전의 풍경은 흔적이 없다. 온몸에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았다. 서둘러 걸어온 길로 빠져나오다가 다시 우리가 살던 집 앞에서 멈추었다. 눈으로 나무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없다... 세상에... 길이 없다. 우리 가족이 무수히 오르던 돌담과 돌담사이 그 예쁜 돌계단이 없다.

차라리 오지 말 것을... 직접 확인한 순간 내 기억에 머물던 달빛이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길들을 수없이 목격했으면서도 이 순간은 처음인 양 와르르 무너지는 상실 속으로 그리움이 들어갔다.

돌아보면 지워진 길이 늘어갈수록 새길이 있었다. 그 빛나는 길을 수없이 연결하며 살았으면서 유난히 고향의 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은 것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그리운 서정이 흐르기 때문이다.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가슴아린 사람이 있고, 다시는 걸을 수 없는 그리운 길이 있다.  진심을 다해 마음을 주었던 순간들이 소멸하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야포 포구 @2001

안도 백금포 해수욕장@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