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서면

하얀 청춘들이
눈부시게 열을 맞춘 그 자리에 서면
문득 손목을 붙잡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어느새 아빠의 사춘기 나이를 추월해 버린 아이들이
이어폰 한쪽씩 나누어 끼고 엄마 곁에 앉아 있고,
아버지의 앳된 군복 사진을 닮은 청년들은
비석 앞을 맴돌며 술잔을 만지작거립니다

허리 굽은 노모는 장성한 자식의 이름을 찾아
마른 잔디 위를 아지랑이처럼 헤매고,

언제나 청춘이던 그들은 머리가 하얘져
꽃다운 나이의 친구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그곳에 서면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옅어져
흘러나오는 침묵마저
흰 옷자락에 얼룩을 남깁니다.

그들의 등 뒤에 멈춰 서서

바람이 대신 전하는 사연이라도
가만히 들어줘야 할 것 같은 계절입니다

네 멈춘 자리 우린 자라서
이종희
반짝이는 연두는 보슬비에 안장될 거라고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휘어진 구간을 지나야만 초록으로 번질 수 있다고
숙명의 가지를 늘리며 묵묵히 걸어가는 길 위에서
햇살에 묻어온 초여름 냄새가 푸른 제복을 적실 때,
군용 트럭 위로 흩어지는 너를, 가엾은 너를
하늘이 잠시만 보살펴주었더라면
무한한 숲을 장전했던 그 맑은 연두는
마음껏 관지觀止의 공기방울을 들이키며
너른 세상으로 걸어갈 수 있었을까
금방 부서질 것 같은 낡은 관행이 우둠지를 넘보는 사이
영문도 모른 싹들은 끊임없이 네 뒤를 따라가고
귀밑머리 하얘진 친구는 박제된 연두를 찾아 헤매다가
체온이 채 식지 않는 비문 앞에서 무너지곤 했다
이 땅의 청춘들은 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와 멀어져야 하는지 물음표를 대필하던 재목마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채 갈잎으로 흩어지고
한 번도 초록에 가닿지 못한 잎새들이
우리의 평안을 염원하며 기꺼이 시들어간 현충원에는
탄식의 메아리가 빛바랜 역사로 발굴되길 바라지만
저기 저, 끝자리 아까운 연두물이 또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