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은...
섬마을로 다시 내려 간지 일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깊은 겨울 밤이었습니다.
측간을 가기 위해 여느 때처럼 그 시간만은 짝이 되어준 동생과 우리집 부엌 처마 밑 장독대를 막 지났을 때 어둠을 가르며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을 어린 자매는 금세 알아 차릴 수 있었지요.
좀처럼 오지 않은 눈을 기다리기 보다는 눈 내리지 않은 섬마을이라 단정 지어 버리는 게 오히려 속 편했을 시간, 우리의 예상을 무너뜨리고 뜻밖에 내린 눈은 점점 함박눈으로 변해가고 있었답니다.
어린 자매는 어렵게 내려준 눈이 사라질 새라 저녁나절에 엄마가 길러 두신 물동이에 가득 담긴 샘물부터 쏟아 버리고 물동이를 마당 한복판에 옮겨 두었지요.
그리고 세수대야, 뒤란에 걸어둔 광주리까지. 그 날밤 기억을 떠올 릴 때면 나는 어느덧 초라했지만 따사로운 봄볕 같은 우리옛집 마당에 가 있습니다.
간밤 일들이 꿈일까 봐, 눈을 뜨자 마자 부리나케 나가본 마당에 전시해 둔 통들은 백설탕 같은 눈을 가득 머금고 무척이나 부푼 포만감에 휩싸여 있었답니다.
그날 아침 우리집 초가지붕과 측간 양철지붕 기둥들은 하얀 세상을 힘겹게 떠받고 있었지만 ,섬마을엔 온통 눈꽃이 피어 “천국은 바로 이런 곳이었을까.”싶었지요.
그 후로 오랫동안 첫눈이 내리지 않은 섬마을이었지만, 그렇게 모든 게 귀했던 만큼 내 유년은 우리집 뒤란에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던 솔가리 타는 연기만큼이나 아련하고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을 때면 내 가슴은 이른 새벽 풀잎에 고인 이슬을 만나고 그 속에 나는 한나절만이라도 갇히고 싶어집니다.
문득, 지난해 한밤중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한 교민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무려 8년 동안의 이국생활을 청산하고 꿈에 그리던 고국 행 티켓을 끊어놓고 어이없이 세상을 뜨게 되셨지요.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힘들게 얻은 이국생활의 열매로 고국에서 시작할 새로운 일을 어느 정도 진행하던 도중에 일어난 사고였다는 거에요.
의료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먼 이국 시골 병원에서 휴대용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다 두시간만에 그 귀한 생명의 불씨는 꺼져갔다고 하더군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추억과 무엇보다도 그 동안 애써 다듬어둔 무지개 빛 세상을 남겨두고 그분은 어떻게 삶의 끈을 놓을 수 있었을까….감나무의 감이 순서 없이 툭툭 떨어지듯 한다는 인생의 끝은 이것이었을까.
이분의 가슴아픈 사연을 접하면서 내가 아무리 운명의 지침을 돌리고 싶다 해도 올 것은 오고야 말리라는 허망한 꿈들이 한동안 제 가슴을 천근만근 무게로 짓누르곤 했었지요.
어느덧 무뎌지고 나태해진 생활이다 싶으면 여지없이 드리워진 그늘에도 그래도 매일 고향 바다같은 하늘을 볼 수 있음에,그래서 내 오랜 기억을 회상할 수 있음에 나는 이 순간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행운을 얻고도 욕심을 부린다면 내 삶의 종점이 이렇듯 ‘어느날 문득’ 이 아니라면 참 좋겠네요.
그러고 보니 지난해 여름 작별한 나의 옛집 돌담에 오롯이 피어있던 하얀 타래 꽃이 보고싶고 오막살이 온돌방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던 고구마 두지의 캐캐한 흙 냄새가 맡고 싶어집니다. 시간이 흐르면 내 마음은 변덕스러워 또 다른 그리움을 찾아 나서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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