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구치 터널을 아시나요?
총 길이가 250km 이고 만드는 세월만 어림잡아도 20년은 걸린다는 구치 터널을 다녀왔습니다.

(광활한 초원 위에 연둣빛은 이제 막 움튼 모들입니다.)
흔히 개미 때 같다고 표현하는 호시민 시내 오토바이 행렬은 아침부터 크고 작은 도로를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지요. 여울목처럼 흘러가는 오토바이들의 뒤를 따른 지 2시간 30분 만에 우리는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 구치 터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길을 잘 못 들어 중간에 비포장 도로를 헤매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덕에 베트남 요즘의 농촌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월남전 때 미군들이 사용하던 무기들)
몇 달째 비가 내리지 않는 이 땅의 풍경은 생각보다 풍요롭고 여유로웠습니다. 광활한 초원 위엔 이제 막 움이 튼 모가 자라기도 했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벼가 익어 누렇게 출렁이고 있었지요. 오랜 전쟁을 겪었던 땅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평화가 깔려 있는 땅, 우리는 그곳을 지나온 것입니다.
이윽고 입장권을 구입한 우리는 내,외국인의 편을 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앞장 서는 가이드를 따라 거북 등처럼 갈라진 오솔길과 고무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진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쟁시 터널 공사하는 모습을 그려두었습니다.)
마마가 할퀴고 간 얼굴처럼 심하게 일그러진 숲속엔 크고 작은 웅덩이가 곳곳에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전쟁 때 포격 맞은 흔적들이라고 같은 설명을 들은 일행에는 어린 아이를 포함한 인도인 가족, 프랑스 연인, 중국인 미국인 관광객,그리고 한국인 한 가족이 포함돼 있었지요.
가이드는 흙을 일부러 쌓아둔 둔덕 같은 곳을 가리키며 터널 안에서 밥을 지으면 아주 먼 거리인 이 곳 굴뚝으로 연기가 빠져 나가기 때문에 쉽게 적에게 들킬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터널 안 연기는 먼 거리인 이 굴뚝으로 빠져 나왔답니다.)
허연 석회질로 다듬어진 오솔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춰선 가이드는 주위에 터널 통로가 있으니 찾아 보라고 하더군요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자 가이드는 낙엽이 덮어진 바닥에 감쪽같이 숨어 있는 네모난 뚜껑을 열어 제치더니 까맣게 들어 난 구멍을 가리켰습니다. 몸집이 작은 베트남 사람만 들어 갈 수 있을 만큼 좁게 만들어진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가이드는 순식간에 우리의 등 뒤, 15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불쑥 뛰어 올라와 놀라게 하더군요. 정말 지능 적인 게릴라들의 아지트다웠습니다.

(몸집이 작은 베트남 군인만 통과할 수 있는 터널 입구에 가이드가 시범을 보입니다.)
비교적 넓은 터널 속으로 들어온 우리는 15미터 깊이의 우물이 그 안에 있다는 것에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릴라 들의 식수인 우물을 한참 설명하던 가이드는 우리 식구를 보더니 갑자기 천정을 가리키며 “여기가 공기구멍!” 이라고 짧은 한국말을 하면서 활짝 웃더군요. 뜻밖의 말에 어둑한 터널 안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구치터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거쳐간 곳이기도 했겠지요.

(월남전시 식수였던 터널 안의 우물은 깊이는 15m랍니다.)
지하터널 야전 병원에 전시되어 있는 그때의 의료 장비 중에는 총상을 입은 군인의 신체 부위를 잘랐다는 실톱도 있었습니다. 순간 여지없이 파고든 잔혹한 세월의 파노라마가 제 상상력 위에 펼쳐졌습니다.

(구치 터널에 전시된 크고 작은 탄피들)
짧은 몇 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익숙해진 오리 걸음으로 또 다시 우리는 까만 터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미등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켜져 있었지만 워낙 좁은 통로인데다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줄을 지어 가다 보니 캄캄한 어둠만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앞서간 아들녀석이나 뒤따른 딸아이에게 앞 사람 옷을 잡고 뒤따르라 일렀지만 숨막힐 듯 밀려든 공포에서 저 역시도 자유로울 순 없었지요. 겨우 기어가거나 오리걸음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 터널이 원래는 지금의 절반 크기였다고 하더군요.

(관광객을 위해 넓힌 터널 입구)
빛이 막 스며 들어올 즈음 앞서갔던 인도인 아낙이 붙잡고 올라오라고 다정하게 손을 내밀더군요. 겨우 30미터의 어둠과 공포를 체험했을 뿐인데 일행 모두의 등줄기에는 보슬비 맞은 창문처럼 땀 방울이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긴박한 긴장에서 막 해방된 허탈과 환희가 뒤섞인 얼굴위로 시원한 산들 바람이 머물렀습니다.
더 이상 터널 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우리 일행을 가이드는 비교적 넓은 공간이 확보된 지하 응접실로 안내하더군요. 그리고는 전시 때 주식이었다는 삶은 마와 베트남 전통차를 한잔씩 따라 주었습니다.

(전쟁 때 게릴라들은 폐타이어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답니다.)
온 몸에 석회가루를 뒤집어쓴 몸집 큰 미국인 아저씨에게도, 소풍 간다면 좋아라 따라 나서던 제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멋 모르고 터널 속으로 들어가 벌을 선 우리들에게도 그날은 잊지 못할 추억이고 체험이 되었습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잠시 중단되어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파기 시작한 구치 터널은 남 베트남 수도를 압박하는 게릴라들의 근거지로 미군의 대대적인 포격의 과녁이 되어야 했다더군요. 그래서 지하 10m까지 파 내려간 굴속마저 그들에게 안전지대가 될 수는 없었답니다.
그 당시 북한은 한국 군인이 투입된 만큼의 병사를 지원해 주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이 나라 군대가 받아드리지 않았다는 비화가 있습니다. 외세의 도움 없이 그 전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길고 험한 터널을 수공으로 일일이 파 들어갈 만큼 강한 인내심과 철저한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성에 있다고 합니다.

(벤투옼 구치 터널 사당에는 구치에서 죽어간 만 여명의 전사자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전쟁시 미군들이 쏟아 부은 수 많은 탄피가 곳곳에 흉물스럽게 전시되어있고 세월만큼 녹슨 탱크며 헬리콥터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그 옛날 아픔이 고스란히 쌓여있었습니다.그리고 그곳의 푸른 초목들은 이 땅에 뿌리내린 평화만큼 나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벤투옼 구치터널 강가에는 전사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큰 사당이 지어져 있었는데 사당 중앙에는 호치민 흉상이 세워져 있고 구치 터널에서 죽어간 만 여명의 전사자 명단이 3면의 벽에 빼곡 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당을 찾았고 그들의 명복을 비는 향내는 여전히 멈추질 않았습니다.

사당을 찾은 베트남 군인들
어느 항공기 광고에 나온 베트남 하롱베이는 삼천 여 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천연의 비경을 연출하고 있다더군요. 아무리 유능한 사진 작가도 제대로 찍어 낼 수 없다는 하롱베이를 지난날 전쟁 때 미군들도 반하여 차마 파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비경만도 못한 사람의 목숨은 지금 이 순간에도 까만 주검으로 변하고 있겠지요. 그 사람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구치터널 주위 강물 위에는 수 많은 부초들이 빠른 물살을 타고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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