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산문

나의가족

내 부모님을 떠 오를땐 아련한 아픔이 젖어듭니다.

일찍 아버진 큰 돈을 모으셨데요.그래서 신혼땐 남부럽지 않은 생활도 하시고 그당시 동네에서 유일한 기관실이 딸린 큰 배 선주가 돼신 거지요.

오빠가 태어나고 내가 태어났을때 아버진 그 배를 타고 어부들과 고기잡이를 하셨지요.

바다에 나가지 않은 날 이면 오빠와 난 아버지를따라 그 큰 배 위에서 놀곤 했어요.배 뒷쪽엔 네모난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난 그 주변에서 놀다가 번번히 물에 빠저 죽을뻔 한 일을 아버지가 건저주곤 했데요.

그런데 몇 해 동안 고기잡이가 돼지 않고 자꾸 빗만 늘어나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을때 우리 부모님은 모든걸 정리 하고 고향을 뜨기로 했데요. 그때 부터 나의 슬픈 유년 시절이 시작 되었어요.

고향을 떠나면서 내 부모님은 오빠와 날 할머니집에 남겨두고 떠나셨거든요.

아주 가끔 할머니를 따라 엄마를 만나러 가면 난 엄마 목덜미를 안고 떨어 지지 않으려 했어요. 내 그리운 엄마 냄새를 맡은 거에요.

그때 우리엄만 그런 딸아이와의 이별에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셨을까......

어떤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크게 울고 있을때 난 그 모습을 보면서 '난 할머니와 사닌까 할머니~하면서 울어야 할까'하고 혼란 스러워 했어요.

난 내가 놀던 동백나무아래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두 갈래로 나눠진 나무 한쪽을 안고 저 아래의 길을 한참동안 처다보다 내 다리가 나무에 끼어 빠지지않아 어른들이 와서는 한쪽의 나무를 베어 날 꺼내 주곤 했어요.

다 커서 난 한쪽이 베어진 나무들을 보면서 그나무들에 미안한 생각을 아프게 했지요.

어느날 엄마가 내러오셨지요 엄마품에 잠을 자다 깨어보니 엄마가 보이지 않았어요.잠깐 외할머니 만나러 간 사이 였어요. 난 어둑해진 밖을 새벽인줄 착각하며 공동묘지 밑에 있는 밭에 갔을것 같아 희미한 산 길을 올라 밭에 가 보았지요 아무도 없는 그 큰 밭이 갑자기 무서워서 산을 내려올땐 내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죠.

오빠가 학교에 가면 난 늘 심심 했어요.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아무도 없는 날이면 엄마가 사준 책가방을 메고 새옷과 새신을 신고 안도 초등학교가 보이는 언덕까지 가 보곤 했어요.

학교에 입학하고 그런 우릴 엄마가 보시고 더 이상 떨어 질 수 없음에 우릴 데려 가기로 결정하신 거지요 난 그때부터 참 많이 변하고 밝아 졌어요.

일학년 초 우린 여수에 있는 진남 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어요.큰 운동장과 큰 학교 건물이 내 작은 어깨를 짓눌리는것 같았어요.

일년후 우린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어요

내가 살던 안도 만큼이나 많은 추억을 간직한 그곳은 지금도 내기억속에 예쁘게 자리잡고 있지요 그곳은 곡성이라는 농촌 이였어요

이사는 먼저 했는데 전학 통지서가 오지않아 학교에 몇일 못가게 되었어요.난 내가 다닐 학교가 궁금해 혼자 학교 까지 가보지요.

학교 운동장 나무그늘아래 혼자 앉아 있는데 교실에서 학생들이 비료포대 하나씩 들고 내가 있는 나무 밑에 모여 선생님의 지시에따라 움직이고 있었어요.난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한 선생님이 오셔서 몇한년 몇반이냐고 물어요 얼떨결에 난 그전 학교 반 을말하고 말았어요 그랬더니 저쪽으로 가래요 준비물 안가져 왔으면 손으로 귀와코를 가리고 눈감고 앉아 있으래요 난 그렇게 해야하는것 처럼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었죠. 지금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황당해요.

우리가 사는 주변에는 큰 시냇가가 있었고 그 위를 건널수있는 다리가 놓여 있었지요. 다리끝 한쪽엔 키 큰 포플러 나무가 있었는데 바람이 불때마다 그 나뭇잎은 햇쌀받은 물결처럼 반짝거렸죠.

아버지가 집에 계신 날이면 우린 그 냇가에가서 작은 물고기를 잡으며 놀기도 했어요. 우리집 가까이에 같은반 남자 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애집은 엿을 만들어 고물과 바꾸는 장사를 했어요 그애는 나에게 엿을 하나씩 갔다주곤 했지요. 어떤날은 그애 집뜰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고물을 장난감 삼아 놀기도 했어요.

하루는 무엇때문인지 그애와 냇가에서 큰 싸움을 했어요 내옷과 그애 옷이 엉망이 되었을때 그아이 코에서 피가나고 만 거에요 나와 그애는 너무무서워서 한참 울다가 내가 그 시냇물로 씻어주었어요 그애는 지금 그때일을 기억 할까............................

곡성역 주변에는 압록강이라는 조그만한 강이 하나 있었는데 난 거기서 개 헤엄을 배웠어요.학교 과목 시간에 북한에 있는 압록강을 배우면서 이 강과 연결이 자꾸 연결이 돼서 헷갈려 하곤 했어요 그 강에서 놀다가 돌아올땐 같이 놀던 동네 아이들과 기찻길을 걸으며 철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카시아 잎을따서 손톱으로 튕기는 놀이도 했어요 .

기차가지나갈때 그냥 서 있으면 기차에 자석처럼 붙어 버린다는 한 아이의 말을 듣고 기차가 멀리에서 오는걸 발견하고 그 기차가 지나갈 때 까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작은 나무를 꼬옥 붙들곤 했지요

곡성역에서 한 정거장을 가면 작은 간이역이 있는데 압록이란 곳이지요.

마을 앞엔 푸른 섬진강이 흐르고 그곳에 맘씨좋은 우리 큰 고모가 살고 있었는데 해마다 감이며 복숭아며 한자루 가득 따다주곤 했어요. 우린 심심하면 그고모집에 갔죠 고모집은 농촌보다 산촌이라 하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산위로 자꾸자꾸 올라 가야 했어요 어느해 봄인가 철죽이 유난히 화사하게 피던날 난 철죽꽃을 한아름꺾다가 철죽나무 밑에 있는 징그런 뱀을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신발이 벗겨졌는지 옷이찢겨졌는지 한걸음에 도망처 내려왔지요 그후론 아무리 철죽꽃이 예뻐도 가까이 가지 않았어요.

그곳 겨울은 한없는 눈이 내려 온통 하얀 세상을 만들기도 했어요 .

적당하게 눈온 뒷 날엔 고종사촌 오빠들과 산토끼잡으러 온 산을 토끼처럼 뛰어 다녔죠 난 토끼를 잡는 것 보다 눈 을 차며 뛰는게 더 즐거웠어요.

이젠 맘씨좋은 우리고모도 산비탈에 흐트러지게 피어있던 철죽꽃도 볼 수 없지만 내 맘속에 평화롭게 자리잡고 있어요

우리엄만 우리 때문에 늘 가슴아파했지요 유난히 병치래를 많이한 내가 겨울방학내내 밖에 나가지 못하면 엄마는 한 없이 안타까워 했어요.

성질이 급하고 겁도 많아 가끔 오해도 사지만 난 엄마의 따뜻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아직도 엄마에겐 우리가 인생의 전부예요

우리 부모님께서 열심히 사셨던 까닭에 그많은 빗이 다 갚아갈 무렵 우린 그 정든 곳을 떠나 여수로 내려 왔지요. 오랜 향수병에 몸닳아 하시던 부모님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 가기로 마음 먹고 이삿짐을 큰 배에 싣고 우리도 그배에 올랐는데 너무 오랬만에 배를 타서인지 배가 가는지 부두가 가는지 구분이 잘 안됐어요

그런데 내 그리운 아버진 평생 얼마나 그 빗 때문에 시달리셨는지 우리가 어느정도 자리잡고 살 무렵 아주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항상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우리만 보면 행복해 하시던 우리 아버진 그렇게 큰 병이 당신몸에 자라고 있다는걸 몰랐어요.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어느분은 아버지 병 소식을 듣고 마을 저수지 물을 다 빼고 그 병에 좋다는 큰 고기와 우렁이를 건져다 주시곤 그병이 빨리 낳기를 그렇게 바랬지요.정말 고마운 분이 예요.

아버진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셨지만 우리들 가슴속에 열심히 살지 않으면 가족을 지킬 수 없다는 진리를 남겨 두었지요.

아직도 아버질 생각 하면 눈씨울이 붉어 지지만 항상 어느곳에서든지 등대처럼 우릴 밝혀 주실 거라 생각해요.

누구보다 효자인 우리오빠 아직도 큰 짐을 짊어지고 가지요.몇해 전엔 우리가족 모두가 내려가도 넉넉히 지내다 올 수있는 집을 홀로계신 엄마께 지어드렸죠.매일같이 엄마의목소리를 확인 하는 우리오빠, 난 이런 오빠가 있어 정말 든든해요

그렇게 일찍 아버지를 공허하게 잃어야 했던 우리 막둥이는 나름데로 잘 커서 지금은 예쁘고 착한 색시 만나 알콩달콩 살지요.

내 바로 밑에 동생은 성격이 나와 반대 였지요. 어렸을때부터 공부도 잘 하고 노래도 잘했는데 나와는 지겹게 싸웠어요.항상 나의 말문을 막아버려 난 화가 많이 났어요. 지금은 우리 엄마가 그동생을 낳지 않았으면 난 참 외로웠을 거라 생각 하며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죠.

내 초등학교 기록부엔 다섯번의 전학 기록이 있어요 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어 아쉬움도 많지만 여러곳의 경험은 내 마음의 보석 처럼 늘 반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