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린 이종희

시·시집- 너에게 가는 길 19화

사과

끝내 하지 못한 말

둥근 것을 깎다 보면

칼날 끝에서 붉은 살갗이 먼저 밀려난다

볕을 너무 오래 머금어

속부터 갈색 멍이 번져가는 동안

떨어지지 못한 꼭지가

메마른 가지 끝을 물고 버틴다

서리가 내린 뒤에야

껍질은 제 안의 온도를 다 쓰고 붉어졌다

나선형으로 깎인 껍질이 바닥에 똬리를 틀 때

베어 문 자리마다

공기와 닿아 빠르게 갈변하는 과육

단단하게 굳은 중심부에는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검은 씨앗 몇 개가 박혀 있다

그대에게 건네려다 주저앉은 손끝에

지워지지 않는 붉은 즙이 흥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