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행과 연 사이에 머무는 마음
317편 · 2 / 16쪽
시·
보푸라기
결이 닳는 쪽으로 흘러갈 테니까요
뜨개질이 잘못된 줄도 모른 채 겹쳐 입은 옷이었나 봐요 포근한 결 사이에 가시가 숨어 있었던 줄은 살갗이 따끔거리고 나서야 알았지요 부대끼는 얼룩마다 얼굴은 몽글…
시·
명자의 환희
고진감래
빛을 삼키던 초록의 맥박이 끊기고 부풀던 기대가 일순 시들었지 위로 뻗어가던 잔가지가 차가운 가위질에 툭, 툭 잘려 나갈 땐 비명 대신 침묵이 고통을 줄이곤 했지…
시·
하모니카
상처를 빚어 만든 호흡
은빛 빗장을 입술에 물면 닫혀 있던 통로의 매듭이 반음계의 계단을 타고 흔들린다 안으로 삼킨 모서리를 호흡으로 둥글게 밀어 허공에 놓으면 구멍마다 고여 있던 차가…
시·
30초 다정
인스턴트 위로
갈색 콩처럼 바짝 마른 안부들을 쏟아 넣는다 우리는 서로의 눈 대신 깜빡이는 전원 버튼을 바라보았다 윙, 하고 기계가 대신 울어줄 때 납작하게 갈려 나가는 건 나…
시·
소라의 꿈
바닥으로 미끌리는 삶은 비명을 저장하는 암시부터 배운다 진흙의 식도에서 태어나 검고 차가운 해류가 서정을 물어뜯을 때마다 몸을 비틀어 안으로 안으로 도망쳤다 상처…
시·
성에꽃
지나간 슬픔에 대하여
밤새 어둠이 새겨 넣은 기호를 읽는다 제 몸을 꺾어 세운 하얀 뼈마디들 부서지기 쉬운 표면 위에 엉겨 붙은 말들이 서늘하게 굳어 있다 식어버린 줄 알았던 온도가…
시·
그 겨울 수채화
지워지지 않는 무늬
젖은 도화지의 끝자락, 위태로운 모서리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에게 젖어갔다 차라리 눈송이로 흩어질 것을 비도 눈도 아닌 시간을 데우느라 허공의 농도만 묽어지던…
시·
단절된 주파수의 사계
벽
꽃들이 피어나는 길목에서도 외부 입력을 꺼둔 너는 귀를 닫기 위해 설계된 장치 상처를 거르는 필터라 믿었던 벽은 모든 소리를 튕겨내는 방음판이었고 스스로 켠 차단…
시·
양자역학
빛이 오래 머문 이유
그날 우리는 일정에도 표시되지 않은 좌표에서 서로의 미세한 떨림으로 잠시 닿았다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현실로 굳어지는 순간 앞서간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이라…
시·
외딴섬 사용설명서
홀로서기
소란한 뭍을 등지고 나는 닻을 올렸다 타인의 문장으로 빼곡히 적힌 낡은 지도를 찢어 바다에 띄우고 오직 나만의 해류를 따라 흐르기로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고립이라…
시·
제2의 얼굴
제2의 피부
이종희 가장 매끄러운 미소를 골라 아침마다 얼굴 위에 덧씌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패라 변명하지만 사실은 가장 많이 쥐기 위한 그릇이다 두 개의 뚫린 구멍으로…
시··사진 13장
메리골드에게
포토에세이-4
너는 노랑으로 태어나 노랑으로 피었고 나는 분홍으로 태어나 분홍으로 피었지 너와 나는 여린 꽃잎이어서 작은 바람에도 쉽게 얼룩이 생기기 그래도 우린 그림자를 꺾으…
디카시·
단풍
디카詩-9
마음의 폭을 넓히라고 날마다 조언하던 잎새가 막상 구겨진 감정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건 가을이니까, 그런가요?
시·
바람 속의 풍경(風磬)
이제 막 눈을 뜬 산사 목어는 바스락거린 고요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썰물이 진 자리는 밀물이어도 허공이다 파도의 소란에 심연이 흔들리며 먼 바람을 그리워할 때가 있…
시·
가을 배송
"부추꽃이 활짝 폈네. 이제 가을이 왔나 봐." 단톡방에 남긴 친구의 가을 한 줄, 설렘을 가만히 풀어 향기를 맡았을 뿐인데 어느새 청량한 공기가 내 안에 들어와…
디카시·
쉿! 조용
디카詩-8
가만있음 본전은 하잖아
시··사진 8장
상사화
詩의 뜰-21
땅속 깊은 곳에서 뿌리는 하나로 영글지만 너와 나는 엇갈린 운명이다 우리는 일생을 피어나기 위해 시들어야 하고 시들기 위해 피어나지만 꽃이어도 좋았고 잎이어도 좋…
시··사진 8장
[베란다 풍경] 상사화와 꽃무릇
땅속 깊은 곳에서 뿌리는 하나로 영글지만 너와 나는 엇갈린 운명이다 우리는 일생을 피어나기 위해 시들어야 하고 시들기 위해 피어나지만 꽃이어도 좋았고 잎이어도 좋…
시·
섬마을 동화
나는 일곱 살 오빠는 아홉 살 할머니 산밭에서 어른들이 캔 고구마를 들고 소나무 산길과 비탈진 언덕을 스쳐 반달 모양의 돌담을 휘어 돌아 새랍에 막 들어섰을 때…
시··사진 7장
여전히 그 자리에
詩의 뜰-20
다시 피려는 꽃잎에 인연의 실마리는 늘 더디게 걸어왔다 공을 들여 가꾼 다정이 말라갈 때 어떤 이는 침묵의 뒤란으로 시들어 가고 어떤 이는 포개지지 않는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