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행과 연 사이에 머무는 마음
318편 · 8 / 16쪽
시·
등대가 깜박이는 이유
바다에 초록빛 눈물이 낭자하다 지척에 목선을 두고도 만질 수 없다니 등대는 생의 안쪽을 비워버린 패갑으로 꽁꽁 동여맨 암초의 의지를 떼내고 싶었다 밖으로 흘러나갈…
시·
멈춰버린 시간들
어둠에 출렁이던 욕조가 부식된다면 잃어버린 볕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모든 슬픔의 방수는 바다가 끊긴 첫해부터 보장될 것이라고 앞다투어 긁어대던 물소리는 다 어디로…
시·
빗방울에게
너를 보내고 나는 공허하다 숨 쉬지 못한 풀잎이나 태워버린 마른 바람으로 간다 마음을 부려놓을 의자도 없고 다시 온다는 새벽도 없다 오랜 먼지처럼 창백한 날개를…
시·
빈 수레
옆집 마당 귀퉁이에 빈 수레가 있다. 비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독한 일인가. 삶의 무게는 어디로 떠난 것일까... 한바탕 굿판을 벌이고 떠난 자리처럼 여기저기 상…
시··사진 10장
매화는 코끝이 시큰해져서
시린 겨울을 견딘 보람도 없이 하얗게 흩어져 흔적을 지울까 봐 당신은 먼 길을 돌아오셨나요 어둠 속에 웅크린 나를 깨우고 머뭇거린 걸음을 다독이던 당신, 설익은…
시·
해의 임종
해가 떠나기로 한 바닷가 오차 없는 명중을 위해 포수는 숨 가쁘다 일제히 표적지를 향한 총구 땅끝 자석에 이끌린 관객들이 스르륵 밀려와 붙는다 팽팽한 긴장이 옥죄…
시·
산 너머에 큰길
가고 싶은 길이 있었으나 갈 수 없는 길이라고 체념하고 돌아선 자리에 서러운 바람이 불었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으나 걸을 수밖에 없는 길 위에 나무를 심어 두고…
시··사진 4장
노을
詩의 뜰-10
파도가 밀려간 바닷가 시간 끝에 마주한 우듬지 정작 그가 떠난 건 순간이었다 날카롭고 견고한 그 무엇도 잡을 수 없었던 빛의 찰나 허공에 매달린 위태와 떠나간 이…
시··사진 14장
2월 베란다 풍경
삼월 이종희 흙이 자꾸 고개를 들어요 싹들이 앞다투어 손 내밀고요 마른나무 위로 자꾸 물이 오르는데요 시샘 바람이 얼굴을 붉히는 바람에 나는 자꾸만 유치해져요 성…
시·
금시계
엄마의 시계 이종희 병상에 누운 우리 엄마,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내 손목에 금시계를 채워주셨다 몸조심하거라, 길이 막혀 아득할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길은 언제…
시·
수세미
볕도 들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한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녀의 야윈 지문은 미동 속에서도 표가 난다 나는 그녀처럼 오지랖 넓은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시·
사라진 직업
뒷방에 들어앉은 나무가 수두룩하다는 정보가 떠돌았다. 태어난 지 칠백이십 날이 지나면 세상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솔가리는 나오자마자 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시·
길 위에서 (2)
길 위에서 이종희 가고 싶은 길에서는 마른 바람을 만났고 가고 싶지 않은 길에서는 풀꽃 같은 사랑을 했고 가야 하는 길에서는 뜻밖의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갈 수밖…
시·
잃어버린 날개
콜라병이 열리는 순간 각혈을 한다 날마다 팽창하던 푸른 혈기, 근육질 거품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물리면 흉터가 깊어진다는 이빨이 부드러운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며…
시·
꿈이었을까
오래된 책갈피 속에 고이 접어둔 지워지지 않는 문장을 꺼내봅니다 슬픔을 담가 우려내면 저 빛일까요 그리움을 떨구어 풀어내면 저 빛일까요 애써 등을 돌리지 않아도…
시·
그 별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너른 바다를 향해 썰물진 사람들이 만조를 이루고 갯벌에 뒹굴던 유년의 기억이 해무에 갇힐 때 공중에 선을 이은 주소지가 등록되었다 새로운 불빛에 속도를 늦춘 사람…
시·
유년의 등불 아래
달님이 음습한 공기를 덮고 잠들던 밤, 오빠가 산 너머 마을에서 돌아오지 못하면서 마중을 가라는 아버지의 명이 떨어졌다. 가지 않겠다는 두 동생을 겨우 달래 가며…
시·
미안해
詩의 뜰-16
부르지 못한 너의 이름이 덜컥, 톱니에 걸려 버렸다 어쩌다 엇나간 재봉틀 속에서 작은 오해의 실밥을 외면했을까 무성한 이야기가 노루발에 실려도 밀리지 않던 진실의…
시·
모기의 위험한 식사 시간
온라인 장으로 날개를 반쯤 접은 중년들이 모여들었다 목표는 흘러나온 정보를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분석하며 자리를 뜨기 전에 최대한 깊게 빨대를 꽂아야 한다는 것,…
시·
진실공방
덜컥, 열린 틈으로 의문 하나가 빠져나온다 뒤늦게 형광등을 켠 기억은 은폐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차디찬 유리 칸에 머문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채택된 증거는 오래전…